4일차 (8월10일)
- 07시 기상
- 08시 외가출발( 감자, 옥수수,등)
- 08시 40분 한계령 휴게소 도착( 기념사진 촬영 및 휴식)
- 09시 20분 설악산 선녀탕 휴게소 도착( 선녀탕 물놀이 및 휴식)
: 곰같은 강아지 만남 * 엄청 기쁨을 맛봄
- 10시10분 백담사 도착( 인제군, 만해기념관 및 인근 계곡 관람)
- 13시 30분 경 홍천군 어론리 경유( 본인 출생지 및 부모 첫 살림장소 경유)
- 14시 중앙고속도로 홍천 기점 진입( 홍천 휴게소 중식: 제법 피곤함)
- 14시 30분 홍천 출발
- 15시 30분 단양휴게소도착 * 홍천, 횡성,원주, 단양구간 기습폭우 운전애로
- 16시 출발 ( 동생 운전 )
- 18시 언양휴게소도착
- 19시 45분 부산집 도착1일차(8월7일)
□ 한계령의 진면목을 한 껏 눈에 담으며(4일차)
○ 08시 외가출발( 감자, 옥수수,등)
- 어제밤 늦게까지 가진 술자리가 아침에도 영향이 미치는지 머리가 어질어질한게 정상이 아닌상태이다. 언제 일어났는지 전식구들은 이미 아침 식탁에 모여 있다. 어제밤의 술자리를 화제삼으며 마지막 아침을 들었다.
- 옥수수랑 감자를 차에 올려주신다. 량이 문제아니고 정성이랄지 아니면 애정이랄지 여하튼 외삼촌, 외숙모의 후의에 감사를 드림다. 앞마당에서 차를 출발시키기전 다시한번 외가댁을 둘러보았다. 자주 와야 할텐데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라는 자신없는 속내를 감추고 마지막인사를 드리고 출발하였다.
- 이제 부산까지 내려갈 길이 멀다. 올라올때는 기대감을 지니고 오느라 피곤한 줄 모르고 왔지만 아무래도 하행길은 상행길보다는 힘이 들 것이다. 그래서 급한 생각보다는 여유있게 갈 작정으로 오히려 양양읍을 돌아 한계령 넘어, 인제, 홍천으로하여 원주, 부산간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하기로하고 한계령으로 출발하였다.
※ 한계령 [寒溪嶺]
강원 인제군 북면(北面) ·기린면(麒麟面)과 양양군 서면(西面)과의 경계에 있는 고개로
높이 1,004m. 인제~양양 간 국도가 통한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하는 고개로, 영동·영서 지역의 분수령을 이룬다. 옛날에는 소동라령(所東羅嶺)이라고 불렸으며 동해안 지역과 내륙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어왔다. 1971년 12월에 양양과 인제를 연결하는 넓은 포장도로가 고개 위로 뚫려 내설악(內雪嶽) 및 외설악의 천연관광자원 개발에도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 이틀전에 들렀던 오색약수를 지나 한계령 에 들어서니 장관이 연출된다. 세계 어느나라엘 가도 볼 수 없을 것이라는 풍경들이 차창밖으로 펼쳐짐에 나는 차의 속도를 가장 느리게 떨어뜨렸다. 물론 이른아침이라 그런지 차량과 인적은 거의 드믈어 주변경관을 감상하기에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인 듯 싶다.
- 십오년전 이고개를 아내와 함께 고속버스에 몸을 싣고 넘을때는 둘 다 피곤에 지쳐 비몽사몽간에 넘은던 것 같은데 그때와 지금은 엄청난 차이다. 물론 십오년전의 숲과 지금의 숲이 어딜 비할데가 있을까마는 올라가는 굽이굽이 마다 산마루, 산등성이가 마치 용이 꿈틀 거리듯 차를 덮친다. 제법 기후까지 어정쩡하여 안개까지 산정상밑으로 살짝 걸쳐진 운치에 그 감상의 재미를 더해준다.
- 어제의 피로는 싹 가시는 듯하였고 보통때 같으면 차에서 전부 잠에 빠졌을 식구들도 전부들 눈이 빤짝거린다.차창문을 여니 빨려들어오는 주변 설악산 공기가 숲의 기운과 함께 전신을 세뇌시키는 듯하다. 하루만 이곳에서 지내도 백년 이상은 아무런 문제 없을 듯하다.
- 곳곳에 있는 계곡과 야영장의 모습에서 바다를 찾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숲속을 찾는게 오히려 건강할 것 같은 생각에 젖게한다. 이와 같은 숲과 계곡속에서 몇일 푹 지내다오면 세상 그 무엇이 부러울까.
- 양양읍을 지나서 한계령 고개를 천천히 하여 약 삼십분정도 올라오니 정상에 휴게소가 있다. 약 800m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한계령 휴게소에 도착하여 차에서 내리니 아래위 할 것 없이 세찬 산바람이 몰아친다. 휴게소 주차장 인근에서는 관광객들이 저마다 기념사진에 조금이라도 주위의 풍광을 담기위하여 자리잡기에 줄을 선다.
- 이 휴게소는 최근 TV에서 몇 번 본적이 있었는데 과연 위치도 그렇지만 아름다운 건축미가 짙은 갈색의 건물 목재 도색이 주변 수려한 경관과 어울려 흡사 동화속에나 나옴직한 예쁜 별장과도 같은 휴게소다. 그러기에 영화나 드라마속 배경으로 나올터지만 직접와서 보니 제법이다. 휴게서 저밑 아득히 내리비치는 계곡과 이곳까지 쭉 연결되는 설악산 굽이굽이 고개들이 꼬불꼬불 산허리를 휘감으며 연결되어 있는 도로가 도로가 아니고 그자체가 경치이다. 휴게소 와 연결되어 있는 야외 식탁에서 커피한잔을 먹으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해본다. 많은 생각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지만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그때 단 둘이었는데 이젠 울 식구가 네명이다. 참 세월이 유수함을 절로 느낀다.
- 이곳저곳에서 식구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아쉽지만 휴게소를 나선다, 우리가 주차장을 빠져 나올떼쯤에 차량과 사람들이 갑자기 몰아 닥친다. 휴게소 뒤쪽으로 난 등산길과 연이어진 암벽 정상이 예사롭지 않다. 문득 올라가봤음 싶었다.
(사진첨부)
○ 09시 20분 설악산 선녀탕 휴게소 도착( 선녀탕 물놀이 및 휴식)
- 이젠 한계령을 내려가는 형세다. 오를때와 다름없는 풍경들이 계속 펼쳐지며 이젠 선녀탕 휴게소에 도착하였다. 주차장에 내려 휴게소 관리인에게 물으니 인근 선녀탕 계곡이 바로 연결되어 있다고하여 잠깐 휴식하고 갈 요량으로 걸어가는데 옆 차량 운전자가 메어놓은 동물이 곰인지 강아지인지 구분조차 할 수 없는 웬 새까만 동물이 엎드려 있는데 보면 볼수록 신기한게 처음보는 동물이다. 민정이와 경덕이도 신기한지 연방 웃는데 휴게소 관리자가 그런다. 이게 중국산 강아진데 흡사 곰과 같아 인간들의 오해에 의하여 많은 피해를 보는 짐승이라고한다. 무엇이 불만인지 가만 엎드려 있는게 엄청 순하게 비친다. 좌우간 처음보는 강아지였다.
- 휴게소 뒤편으로 난 길로 계곡으로 내려가니 계곡물이 장난이 아니다. 옷을 걷어부치고 계곡물에 들어가니 냉장고에 들어 온 기분에 그 맑음이 엄청나다. 여지없이 우리 민정이는 물에 뛰어든다. 아직은 이른 아침 나절이라 사람하나 없는데다 흘러내리는 계곡의 물의 색깔이 옥색의 청정빛갈 고대로하며 양손모아 들이켜보니 물맛 또한 굉장하였다.
(사진첨부)
※ 십이선녀탕계곡 [十二仙女湯溪谷]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있는 계곡으로, |
내설악에 있으며 탕수동계곡이라고도 한다. 밤이면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고 갔다고 하여 선녀탕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맑은 탕이 12개라 해서 12선녀탕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8개뿐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하상작용을 받아 넓고 깊은 구멍을 한 신기한 모양의 탕과 폭포가 8㎞에 걸쳐 이어진다. 웅봉 아래 웅봉폭포를 지나면 첫 탕인 독탕[甕湯]이 나오고 북탕·무지개탕[虹湯]·복숭아탕을 지나 맨끝에 용탕이 나오는데, 그 중 폭포 아래 복숭아 모양의 깊은 구멍이 있는 7번째 복숭아탕을 백미로 꼽는다. 주변에 단풍나무·젓나무·박달나무·소나무 등 나무가 우거져 계곡미가 빼어나다.
찾아가려면 원통에서 진부령이나 백담사·장수대까지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시외버스를 탄다. 승용차로 가려면 인제·원통을 지나 한계리 민예관광단지 삼거리에서 왼쪽 46번 국도를 타고 백담사 방면으로 간다. 계곡을 오르려면 남교리 북천을 건너 대승령을 향해 오른다.
- 손손이 잡아 이끈 민정이는 일부로 빠져보기도하고 세찬 물결에 가볍게 몸을 맠겨보기도하는등 십이선녀탕 계곡의 물자체도 바로 ‘명경지수(明鏡止水)’ 그자체다. 여유만 있었으면 오전내내 놀다 갔으면하는데 도저히 발길 돌리기가 쉽지 않다. 진즉에 이런곳을 알아더라면 다른곳에 가지말고 이곳에 왔었으면 좋았을 뻔 하였다.
(사진첨부)
- 설악의 한계령을 벗어나는 내내 절로나오는 감탄사는 그치지 않는 상태에서 인제 내린천의 표지판이 눈에 들어오는가 싶었는데 모친이 이 근처 백담사가 있다는 말에 다시한번 지도랑 표지판을 훑어보니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단다.
○ 10시10분 백담사 도착( 인제군, 만해기념관 및 인근 계곡 관람)
- 한계령을 벗어난 차량은 어느새 인제군 접속도로에 진입하면서 언제 다시오지 싶어 백담사로 방향을 잡았다. 백담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거의 강원도 지면이 그렇지만 이곳도 마찬가지로 한쪽 산봉우리에 반대쪽 계곡이라 이곳도 역시 설악산에 포함되어 아름답기 그지 없다. 내린천의 지류이며 상류이기도 한 이곳도 피서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고 많은 차량도 몰려 들었으며 인근 군부대들이 많이 위치한 사정으로 각종 군용차량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 백담사 [百潭寺]
강원도 인제군 북면(北面) 용대2리 설악산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재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 백담사 입구에 들어서니 아직은 이른 탓인지 조용하다. 입구에는 ‘만해 백담마을’이라는 표지가 있는 것으로 볼때 백담사와 만해 한용운 선생과의 관계가 느껴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0분정도 걸어들어가니 백담사까지 운행하는 전용 셔틀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예전에는 그 길을 전부 도보로 갔다고하는 것을 볼때 제법 힘든 산행길이었던 것 같았았는데 4년전 왔었던 모친에 의하면 서너시간 내내 힘들게 걸어 갔었다고 한다.
- 도대체 절이 산중에 있는지 산꼭대기에 있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이십분 넘게 차를 타고 들어가는데 오르락 내리락, 그리고 도로가 협소하고 편도인데 상하행 차량의 교차지점에서는 서로 연락을 취함을 볼때 상당한 협조로 원활하게 운전하였다. 아마 네 대 정도 의 차량이 관광시즌에는 바쁘게 움직이는 것 같았지만 도중도중 걸어서 가는 관람객도 있는 것으로 볼때 백담사에 이르는 길을 제대로 즐기기위함이 아닐까 싶다. 특이한 것은 중간 정도 못 미쳐서 대여섯분의 수녀님들이 일렬로 줄지어 가는데 정겨운 모습이다 . 흡사 산보하는 모습들이 정답게 보였다. 그런데 우리는 차를 타고 이렇게 쉽게 가는데 저분 수녀들께서는 종교도 상이한데 저리도 힘들게 가지 않으면 되지 않는지에 대한 궁금심이 인다.
- 언듯언듯 셔틀버스 차창밖으로 드러나는 백담사 계곡의 절경이 예사롭지 않았으며 이계곡은 엄청 고도가 높은 산중에 있기에 참으로 대단하지 않는가. 옛날 승려들은 이 첩첩산중까지 어떤 사연을 가지고 들어와서 절터를 잡았을까.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긴다. 백담사 앞 주차장에 내려 ‘수심교’에 들어서니 그 뒤로 비치는 백담사 전경은 그리 화려하지 않고 오히려 평범하면서 잔잔함을 불러 일으키는 듯하고, 수심교 밑 상류족에 펼쳐진 수많은 돌탑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 매우 많은 이들이 이곳을 방문한 흔적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사진첨부)
- 다리이름이 ‘ 수심교(修心橋)’이니 뜻 그대로 마음을 수양하면서 이곳 백담사로 들어오라는 듯인 것 같다. 식구들 돌아가며 기념사진 몇장 찍고 백담사로 들어서니 생가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요사채, 범종,한용운 선생의 시가 새겨진 비석, 한용운 선생 기념관 및 흉상, 만해당, 극락보전, 삼층석탑등이 곳곳에 위치하였는데 역시나 위인의 이름에 걸맞게 만해 한용운 선생이 거처하던곳이어서 그런지 만해선생의 비중이 많이 차지하는 사찰이었다. 만해기념관에 있는 기록들을 아들놈에게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제법 고개는 끄덕였으나 속에 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이름이라도 그리고 유적이라도 보여주는게 어딜가 싶은 심정이다. 만해 선생의 만남 기분으로 아들과 함께 만해의 흉상에서 기념 사진을 찍었다.
(사진첨부)
※ 한용운 [韓龍雲, 1879.8.29~1944.6.29]
한국의 독립운동가·승려·시인으로,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년(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 그런데 문제는 이곳이다. 요사체 한켠에 있는 전두환 전대통령 이 거처하던 곳이라해서는 도끼로 장작패는 모습의 사진과 평소에 입었던 옷가지, 그리고 등불등 마치 만해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이라도 한 것인양 으름하게 전시 하였는데 참 가관이다. 항상 하는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의 가장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나는 과거사의 완벽한 정리에 의한 국가 정통성 회복이라고 주장하는데 마찬가지로 부당 군사력으로 인한 국가정권의 유린과 수많은 민중 대학살로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고 그와 그의 마누라들의 친인척들이 국가의 부를 침탈한 이들의 잔재가 아직도 이런 절에 버젓이 관람객용 유물로 전시되고 있음을 볼때 현재 종교 지도자들 또한 자기들의 욕심밖에 없구나하는 한숨만 불러 일으킨다 .
- 이미 이들의 행태는 창고로 쑤셔밖혀있어야 할 것들이며 우리나라 역사를 가장 훼손시키고 후퇴시킨 이들이 아직도 자랑스럽게 연금과 국가보위를 받고 있는 현실은 가장 잘못된 역사를 우리 권력자와 민중까지도 도외시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안타까울뿐이다. 아직은 우리 자식들이 어리지만 어느정도 능력이되면 정확한 역사를 가르쳐 주어야할 뿐이다. 왜곡되게 학습되어지는 지금 현실교육은 오히려 또 다른 상처를 안겨 줄 수 밖에 없음이다.
우리자신만의 세대를 보더라도 충분히 당하고 있고 느끼고 있다. 우리들의 자식들에게는 이러한 잘못됨에 대해서는 가능한한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알려주어야만 또 다른 상처와 부담을 줄일수있다고 생각하면서 눈길을 돌리며 나왔다.
- 전체적인 사찰이미지는 조용하고 잔잔하였다. 수많은 돌탑을 주위로 흘러가는 계곡물의 청정함에 다시한번 감탄해하며 나오는데 등산로 표지판에 ‘오세암’이니 ‘봉정암’이니 하는 산꼭대기 암자 표지들이 보였다. 꼭 한번은 가봐야겠다는 암자이름들을 보니 절로 호기심이 일어났으나 체력적으로 무리고 갈길이 바쁜 나로서는 아쉽게도 백담사를 뒤로 하여야 했다.
(사진첨부)
○ 13시 30분 경 홍천군 어론리 경유( 본인 출생지 및 부모 첫 살림장소 경유)
- 백담사를 뒤로하고 차는 다시 인제군 중심으로 몰았다. 점심시간이 조금은 지났지만 아침에 준비해주신 옥수수와 이것저것 군것질로 대충 떼우니 모두들 밥 생각은 없는 듯하고 가능한 한 빨리 갈 요량으로 바삐 움직였다. 오전 내내 잠시 쉬지 않고 설악의 경치에 흠뻑 빠져 있든 육신과 정신이 제법 고속도로와 시내 건물들의 정형화감과, 덧붙여 다시금 내려쬐이는 더위에 눈과 어깨에 피곤함이 짓눌려왔다. 가능한한 빨리 진행하고 싶었다. 어제밤늦게까지 가진 술자리가 이제야 후유증이 밀려온다.
- 다른 것은 정부 고려하였는데 인제에서 홍천까지의 도로사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던게 화근이이었다. 서울 인제간 국도를 세로이 확장공사하느라 곳곳에 공사중이다. 다행히 하행선보다는 상행선이 사정이 나았지만 생각보다는 지루하게 느껴지는 운행이다.
- 이곳 인제는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는 말이 있듯이 인제, 김화,원통을 묶어 강원도 내륙의 철의 삼각지라고도 일컫어지는 고장이다. 원래 한국전쟁시 이곳을 필두로 남북한간 치열한 전투로 이만저만 상처를 입은 곳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타고장보다는 도시의 제기능이 그리 활발하지도 발전하지도 못한 곳이다. 이곳을 우리 부모들은 살았었다.
- 아버지가 군복무를 지원하면서 복무하게 된 것이 강원도가 처음이다. 하사관 교육대를 졸업하고 처음 군복무한곳이 강원도 인데 이런저런 알음으로 인하여 대관령 너머 모친과의 중매결혼이 성립된 것이다. 그시절이 시절인지라 516 군사혁명으로 박정희정권 들어섰고 국내적으로는 상당한 불안정기에다, 국민경제 피폐함으로 인하여 먹고 살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대로 군인들은 밥은 묵고 지냈기에 그것 하나보고 결혼 했다고하니 요즈음 같으면 당연 어려운 결혼이 아니었을까.
- 신혼살림을 집하나 변변치 구하지 못하고 영판 움막같은 곳에 거적하나 걸치면 부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1962년도 홍천에서 나를 놓고 제법 부부싸움도 많아 나는 자주 외가댁 신세를 졌다고하니 세상물정 하나 모르고 사신 모친은 결혼 생활이 몹시 힘든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과는 거의 소외되고 거의 대개가 군인 가족들로만 이루어진 신혼 살림이 뭐 그렇게 재미있었겠냐마는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나혼자 곰곰이 생각해도 어렵게 산 것은 틀림없는 것같다.
- 철원에서 인천동생을 낳아 3년뒤 대구로 이사 가는 동안 부모들은 인제,김화,철원,홍천등의 군부대 고장을 고루 거쳤으니 제대로된 가정생활은 아닌 것 같다. 대구에서 막내 동생을 낳고 얼마되지 않은 내나이 6살 때 군복무 제대하고 부산 친가로 내려왔다고하니 거의 모친 입장으로 봐서는 인고의 생활인 듯 싶다.
- 대구에서의 생활은 조금 나았지만 풍족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곳에서의 나의 유아시절은 말그대로 엉망이었던 모양이다. 내 기억상으로는 군부대 가족들의 전용 마을 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며 지금 대구 달성 공원주위에 위치한 군부대 주변 마을 이었을 것이다. 취학전 공부나 학습, 유치원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 할 수 없었으니 당연 자는 것 빼고는 밖에서 생활하였고 지금처럼 차량등 위험 요소도 많지는 않았을 것이기에 그냥 자연 환경에 맡겨 두는 형태 였다. 그러다보니 같은 동네 애들끼리 놀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면 매일매일 싸움질이고 엄마들은 덩달아 자기애들 잘하였다고 어른 싸움으로 번지고 하는 등 하루가 조용 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 나중에도 그러 하였지만 성격이 괄괄하였던 부친은 나와 동생한테는 엄하게 하신 것이고 그러다 보니 자연 나는 부친을 가장 어려운 상대로 여겼을 것이다. 그시절부터.
하루는 내가 옆집 딸아이와 놀다가 지금도 상처가 있는데 양 눈 미간사이 이마에 큰 흉터가 있는데 제법 큰 돌로 찍혀 피를 엄청나게 흘렸던 모양이고 이를 본 모친은 엄청 흥분하였던 모양인데 부친은 오히려 나의 부실로 야단을 쳤던 사실이 있는데 아마 그때도 나에게만큼은괄괄하게 대하였던 부친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며 치료는 부친이 직접 깁고 치료하였다. 왜냐하면 부친은 의무병과 였으니까. 아마도 어릴적 우리 남매들은 이덕을 톡톡히 봤다. 왜냐하면 우린 어릴적부터 병원에는 거의 가지 않았다. 대부분 부친이 직접 치료하였고 재료가 필요할시는 약국에서 구입하여 직접 치료 하였다. 예방주사니 또 붕대 치료등 거의 직접 치료하였고 부산 거주 할때부터는 친인척들도 제법 많이 치료를 해 주신 것으로 알고 잇다.
- 또한 잊혀지지 않는 사건이 있는데 위와 같은 나의 경우와는 참으로 대조적이다 할 수 있다. 지금처럼 더위에 찌들린 여름이 채 가셔지지 않은 거의 요즘과 같은 때인데 동생과 나는 뒷산으로 넘어가는 저녁 일몰의 햇살의 여운이 남아 있는 마을 입구에서 놀고 있었고 아마 부친의 퇴근시간을 기다렸던 모양이다. 날씨도 덥고해서 모친께서는 연탄불을 별도로 야외에 이동식으로 아궁이를 놓고 저녁 준비를 하였는데 마을 입구에 군복을 입고 퇴근하는 부친의 모습에 반가운 표정으로 동생이 눈깜짝할사이에 마중하려 뛰어갔는데 얼마나 급한진 그 연탄불 화덕을 미처 보지 못하고 그위에 바로 쓸어져 버렸다. 자연 연탄불은 동생 배를 눌렀고 그에 따라 동생은 배꼽 주변 약 15센티미터 정도 큰 화상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때 부모들과 나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른다. 지금도 동생의 상처는 희미하게 있는데 참으로 위험하였던 순간이었다는 생각이다. 그땐 부친은 동생의 잘못에 대해서는 별로 말씀이 없었고 오히려 모친과 나를 엄중하게 지적하였던 기억이 난다. 그땐 엄청 서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시절이 그립기만 할 뿐이다. 그이후로 많은 변화들이 있었고 우리 부모들은 자식 공부에 새로운 시각을 가져 나름대로 부친은 군생활도 힘들고 이런저런 사유로 군생활을 급하게 정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간단한 부친의 판단이 결국은 우리 가족들의 이후의 생계가 더욱 곤궁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친의 고집을 꺽지 못하였던 모친의 후회만이 지금도 남아 있을뿐이다. 1년 만 참았으면 우리 식구들 힘들지 않게 살았을 것이다.
- 인제군에서 홍천으로 이동하는 동안 인제 내린천, 홍천 인근 소양강을 두로 보며 군부대로 둘러싸인 어런리를 경유하였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고장이고 인천 동생이 군복무하는 동안 면회까지 온 고장이기에 눈설치는 않았지만 모친은 그때 그시절과 지금을 연결시키지는 못한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다는 반증이 아닌가. 그때 그시절해봐야 군부대 입구 몇호 되지 않은 인가들 뿐이었을텐데. 아마도 그때 집형태들은 벌써 없어 졌을 것이단다. 단지 이제야 서울 시민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이고장사람들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군사도시도로서의 색깔은 무뎌 져가고 있었으며 도시 전체가 개방되는 듯한 분위기에다 새로운 서울간 고속도로 확장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볼때 이 곳 홍천도 많이 변할 도시중의 하나가 될 모양이다.
- 천천히 운전하면서 보는 나자신도 기억이 날리는 없겠지만 그런대로 눈에 익은 고장이다. 그냥 이곳이 내가 태어난 곳이란 것에만 의미부여를 하고 점심을 먹을려고 하였는데 밀려오는 차량 때문에 기회를 놓치고 홍천발 서울행 고속도로에 차는 이미 올라 버렸다. 결국 태어난 곳에서 점심이라도 먹고 가려고 한 것은 수포로 돌아가고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나니 눈꺼풀이 한 짐이나 된다.
○ 14시 30분 홍천 출발
- 드디어 우리 식구들의 여름휴가는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가득이나 피곤한데 배까지 채워지니 여간 몸이 무겁지 않음을 느낀다. 이제 쉬지 않고 3시간 정도면 충분히 부산 도착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씩씩하게 고속도로에 올렸다. 그런데 원주까지 거의 차량을 볼 수 가 없어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달렸다.
- 원주를 지나 단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기습폭우가 몰아쳤다. 생각지도 못한 폭우였고 여지껏 10년 넘게 운전하였지만 굉장하였다 . 거의 앞이 보여지지 않는 형국이다. 양 옆에서 엉금엉금기다시피하는 차량들이 장난이 아니다. 단양까지는 가야 될 텐데 하는 심정으로 운행하였는데 이 중앙고속도로 자체가 영동 영서지방를 가로 지르다 보니 여름 철 일기가 자연 고르지 못함을 비로소 알았다. 그렇지만 우리 애들은 난리다. 재미 있었던 모양이다.
밖에서는 한밤중같이 캄캄한데다 비는 억수로 내리고 있으며 천둥 벼락소리에 천지간 구별이 없을정도로 난리이니 이 얼마나 재미있는 광경인가. 나도 처음 당하는 장면인데.
- 그렇지만 어떻게 해서 단양 휴게소에 도착하고보니 제법 안정이된다. 여기서부터는 도저히 자신 없었다. 여동생한테 핸들을 맡길 수밖에 없다. 출퇴근용으로만 운전한 여동생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할 수 없이 맡겼다. 난 너무 지쳤다. 그나마 단양 휴게소에 오니 빗줄기도 약해져 있었고 긴장도 풀렸다. 제법 30분 정도는 족히 휴식을 취하고 여동생의 운전으로 부산을 향하였다.
○ 마무리에 부쳐
- 대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올때와는 달리 경부 고속도로를 이용하였다. 퇴근 시간쯤 도착하는 것을 예상 할때 남해안 고속도로는 엄청 막히기에 경부선을 탔다. 언양휴게소에서 간단한 휴식과 주유를 하고 부산에 도착한 것이 7시 30분 전 후 였다.
- 이번 여행에서 난 나의 부모들인생과 그리고 부모들의 부모님들의 인생에 대하여 제법 심도있게 생각 하였다. 나도 나이가 이제 마흔 살을 훨씬 넘겨 오십을 바라보는데 이제까지 가족들과 부모들에게 오히려 짐만 되었지 그들을 위하여 한 것이 한가지도 없었던 같다.
- 나름대로 외가 사정과 나의 부모들의 생활을 어렵게 끼워 긁적 거렷지만 언젠가는 정리를 해 놓을 필요성이 있었고 다행히 이번의 여행이 그런 기회를 만든 것 같아 늦었지만 안도감을 느낀다.
- 과연 가족이 뭔지, 뿌리가 뭔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루하루를 보내고 이윽고 유년의 생활들이 이젠 추억으로만 밖에 남지 않았음을 자신이 알땐 이미 늦었음을 발견하고는 많은 아쉬움을 갖게되는 것이 우리 인생살이 아닌가 싶다. 특히 난 나도모르게 힘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나만치 편하게 살아온 사람도 드물 것이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나보다 힘들게 산 살아온 인생들이 더 많다는 사실이다.
- 이러한 여행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며 작년에 처음으로 전가족이 참여한 인천, 용인 에버랜드 여행이후 올해 두 번째로 가진 이 여행이 아무쪼록 우리 전 식구들의 삶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이래저래 밖에 나가서는 짜증을 내지 말아야 하였는데 일부 있었으면 나의 부족한 탓으로 돌리길 바란다.
- 이번 여행준비하느라 애쓴 아내, 그리고 이런저런 투정을 그 냥 받아준 모친, 하루전날 나에게 엄청 욕 먹은 여동생, 이래저래 원하는 사항의 전부를 들어주지 못하고 나의 입장과 계획에 따라준 우리 애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 무색무취한 생활이 아니고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보내는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이 되었음면한다. 만고에 나혼자 소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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