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일차 (8월8일)
- 06시 기상( 아침산책)
- 07시30분 성묘( 외조부,외조모)
- 08시 작은 외가방문
- 11시2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 12시 주차장 만원으로 대기중 회차(
- 13시 양양 인근 중식
- 14시 30분 오색약수 방문
- 15시 30분 오색 출발
- 16시 30분 냇가 고기잡기
□ 15년전의 추억을 찾아서 (2일차)
○ 06시 기상 (아침산책, 논두렁, 산삼 , 소 이야기)
- 전부 일어나서 세수단장 끝내놓고 아침준비를 하고 있는데 늦게 일어났다. 어제밤에 심하게 술을 한 후유증 때문일까 영 제대로 몸이 움직여 지질않는다.
- 억지로 일어난 나는 아침준비에 분주한 식구들을 두고 애들과 함께 그때의 기억이 있는 외가 뒤편을 돌아갔다. 바로 뒤쪽 산등성이는 올라갈수있도록 산책로가 있어 어른들 몰래 담배를 피울때면 홀로 올라 피우곤 했던 나의 자리가 있었는데 요즈음은 온통 수목들과 잡초들이 번성하여 완전히 밀림이 되어있었다. 외삼촌께서는 그곳에다 산삼 씨앗을 뿌려 놓았다고 했다. 이른바 “ 장뇌삼” 이란 것이다. 요즈음 방송매체에 장뇌삼 광고를 많이 하던데 바로 그것인 모양이다. 이곳 강원도에는 농사일이 바쁘지 않을때는 송이버섯 과 장뇌삼을 자연상태로 방사해서 엄청 재배하기 때문에 아무런 산이나 입산하지 못한다.
산자체가 재산이기에 그럴 것이고 장뇌삼의 경우 명색이 상품 가치가 있을려면 최소한 3년4년은 재배해야 한다고 하니 말 그대로 인고의 고생끝에 소유하는 재산인 것이다. 바로 이런 산삼을 자양하고 있으니 산세가 얼마나 울창한지 상상이 갈 것이다.
- 산삼 이야기를 하니 재미있는 추억이 있다. 내가 5살, 6살때인지 정확하지는 않는데 그때 당시 외할머니께서는 어느날 평소에는 찾아오지 않았던 신기한 꿈을 꾸셨는데 매우 이상하였다고 한다. 외조모께서 그날 바로 이 뒷 산을 올랐는데 이상한 향기와 함께 평소에는 보지 못하였던 매우 청초한 풀이 촘촘히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손수 캤는데 자그만치 7뿌리를 캤다고 한다. 약 10년에서 15년 정도된 것으로 보이는 산삼이라고 하였다.
- 그산삼중 한뿌리를 나에게 먹이도록 하여 먹었던 모양인데 아마 지금까지 잔병 치례하지 않고 그나마 병원에 가지 않는 덕택은 전부 외할머니의 산삼 덕택이 아닌가 싶다. 그 이후에도 자주 그 자리 근처를 배회하셨는데 그 이후로는 발견 할 수 없었으니 그때 당시만 하더라도 산삼을 캔다는 것은 엄청난 복이었기에 주위의 부러움을 많이 가졌던 것 같다.
바로 그 주위에 외삼촌께서 장뇌삼 씨앗을 뿌려 두어 자생케한다니 세상일이란 것이 그냥 의미 없는 일은 아닌가 싶다.
- 산삼이야기는 이정도로 하고 바로 그 산등성 반대편으로 돌아 언덕을 두고 내려가다보면 홀로 떨어진 집한채가 있는데 어린시절 이집에서 또래들과 밤 늦도록 놀았던 기억이 났는데 지금은 폐가가 되어 있었고 , 그밑으로는 큰 저수지가 하나 있어 겨울철 스케이트도 타면서 얼음 놀이를 한 장소였는데 지금은 매립되어 논으로 가꾸어져 있다. 그 논 주위를 아침이슬 맞아가며 경덕이, 민정이와 함께 거닐고 있는데 앞에서 갑자기 노란색 동물이 쏜살같이 튀어 숨는다. 얼핏보니 고라니였다. 민정이 경덕이는 어안이 벙벙한 모양이다, 도대체 뭘까하는 눈빛이다. 고라니임을 설명하고 외가에 오니 아침준비가 끝나고 있었다. 우리애들은 두종아리가 촉촉하게 젖도록 아침이슬 맞아가며 논두렁 걸어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을 것이다.
- 오늘 아침준비에 외삼촌과 숙모는 우리 때문에 일상적일때보다 훨씬 빨리 일어나셨을것이고 아침준비도 꽤나 신경을 쓰였을 것이다. 다른때 같으면 두 부부 단촐하게 아침식사을 하였을텐데 오늘 아침은 외가식구 7명에다 우리식구 6명하여 총 13명 대가족에 따른 아침이다.
- 예전 아침식사는 이렇다. 가마솥에서 지은 밥, 아침 국 대용 인 냉수 한그릇, 물김치나 멸치 조림, 채소 몇 종류, 김 등으로 이루어진 식단이었는데 식사 끝날때쯤이면 거의 빈그릇만 상위에 남는 풍경이었다. 강원도 에서는 그다지 반찬 거리가 마땅한게 없었으며 산골에서 가까운 시장이나 반찬가계등도 없었으니 이와 같은 식단도 꽤나 괞찮은 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산이나 춘천에 있는( 이모댁 ) 식구들이 오면 꼭 추가되는게 있다.
삶은 계란, 돼지고기나 쇠고기 찌개등이 추가된다. 이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전날 저녁늦게나 이른 새벽에 직접 하조대 혹은 양양읍까지 직접 구입하여 준비를 한다.
- 그런데 오늘도 여지없이 예상과 맞아 떨어졌다. 예전에는 김을 직접 구워 칼로 썰어 접시에 담아 올렸는데 다른점은 1회용 비닐포장된 김이다.( 아마 우리와 외사촌 조카들 땜시 아침 일찍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미역국도 있었는데 외숙모 생신이 어제였다고 하니 준비된 국이 아니었을가 싶다. 그리고 어제 오면서 모친이 양양읍내 시장에서 구입한 생선등 , 푸짐한 식탁이었다.
- 우리애들뿐만 아니라 전 식구들이 참 맛있게 먹는 것이다. 우리 애들이야 집에서도 먹성은 알아 주는 편인데 이곳에서도 외가 식구들이 놀랠정도이다.
- 아침후 안산 산다는 정장환 식구는 집으로 떠났고 아직도 독신인 정덕환이도 강릉으로 출발하였다. 아직도 결혼을 하지 않는지 아무쪼록 부모 애 그만 태우고 적당한 짝을 만나 결혼하기를 빈다. 명색이 집안에 장손인데. 외삼촌 말씀이 지에 오더라도 논 밭 근처는 아예 가지 않는다는 자식넘들. 자기 부모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밭에서 일하고 파김치되도록 집에 와도 어디한번 도와주지 않는다고 못내 섭섭한 맘을 표출하지만 부모 입장은 그래도 장가가지 않는게 못내 섭섭한 모양이었다. 언젠가 다음에 다시 만날 것이기에 편하게 이별한다. 이젠 같이 돕고 살아라는 전날 밤의 외삼촌 말씀을 다시금 새겨본다.
- 아침 밥 먹기가 무섭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민정이다. 외양간에 있는 소가 빈번하게 울어 제키니 왜 그러지 하는식으로 마중 나가는 것이다. 하루종일 오물오물 씹어대는 소가 신기하단다. 하루종일 저렇게 먹으면 어떻게 지탱하는지 그리고 왜 풀만 먹는지 그리고 똥은 왜 저리도 많이 싸는지 궁금한게 한두가지 아니다.
- 소의 먹성은 대단하다. 그러나 하루종일 먹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의 위장은 두개가 있다. 그래서 처음에는 최대한 많이 먹는다. 그리고 완전히 사료통을 비웠을 때는 위장에 있던 풀을 다시 꺼내어 먹는 것이다. 이른바 되새김질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한번 먹는 것이다. 보이기에는 하루종일 먹는 것으로 보이는게 당연한 것이다고 나는 애들에게 설명해준다.
- 요즈음은 소를 농사용으로 사육하지 않는다. 예전처럼 비육우가 아닌 육우용으로 키운다. 그리고 농가의 수입을 위해서이다. 어린 송아지를 1년정도 키우면 암송아지의 경우 새끼를 놓을 수 있고 수 송아지의 경우는 우시장에서 판매를 하여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방식으로 소사육이 변경되었다.
- 그런 이유로 예전처럼 소를 방목하지 않는다. 항상 외양간에 붙잡아 메어 놓는다. 많이 먹여 살이 쪄도 되지 않고 야위어도 되지 않는다. 먹성과 체력을 철저하게 관리하여야하며 주기적으로 관계기관에 의한 예방접종과 검사를 받아야 하며 풀만 먹이지 않고 가축용 사료도 함께 먹인다고 한다.
- 이러한 경위도 따지고 보면 소사육이 엄청 힘들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요즈음 세상에는 가축병도 워낙 많고 소사육에 따른 분뇨 수거문제와 그에따른 환경오염 문제등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것들이 많기에 진정 굳은 결심과 의지가 필요한게 사실이다. 모기와 파리로 인한 피해만 봐도 그런 애로 사항을 알 수 있다.
- 하루종일 메인 소가 불쌍하고 측은하게 느껴진다. 모친도 그러고 우리 애들도 그런다. 들로 데리고 나가면 안되느냐고. 요즈음 그러하질 못한다. 사람들이 예날 그사람들이 아닐뿐더러 보는 시각의 차이도 옛날 그시각이 아니다. 아뭏던 내가 봐도 불쌍한 세태에 불쌍한 소다. 비록 가축이라해도 생명있는 존재인데. 감성만 가지고 살 수 있는 세태가 아님에 측은지심만 가슴 한 켠에서 솟아 날뿐이다.
- 나자신이 민정이 나이 정도 였을때는 지금 부산 금정구 선동 조부님과 함께 살 때 학교 갔다오면 매일 지게지고 땔감 하면서 소를 데리고 풀 먹이러 다녔던 기억과 외가에 오면 매일 외삼촌과 함께 집 앞 들로 하천가 뚝으로 소를 데리고 풀을 뜯어 먹이러 다녔었던 기억, 나중 외사촌들이 민정이 나이 정도 였을때는 같이 다녔였던 기억이 있다.
- 그러기에 소에 대한 호기심이 적지만 요즈음 우리 자식들 세대야 어디 소구경을 해보지 않았으니 신기할 수 밖에 없고 애완견처럼은 아니지만 사람과 같이 소가 산다는게 어디 상상이 나 하였겠나. 그러니 이곳은 굳이 컴퓨터니 비디오니 등이 필요 하지 않다
○ 07시30분 성묘( 외조부,외조모에 대한 단상:斷想 )
- 외삼촌께서 오토바이를 타고 비닐에 담아 무엇을 구입하고 오셨다. 오늘 아침일찍 외조부,외조모 산소가 있는 곳에 성묘간다니 간단한 제수를 구입하신 것 같다. 어제 오면서 나름대로 준비하였는데 세심하게 미리 준비하신 것을 보니 부지런함에 절로 감탄이다.
- 외조부가 돌아가신때가 연세 89세, 나의 나이가 아마 27살였을때까 1989년 인 것 같다. 그때 소식을 듣고 모친과 함께 고속버스를 타고 외가에 도착하였을때 초상집의 풍경은 말 그대로 영화나 TV에서나 봄직한 장면 그대로였다. 외할버지의 경우 성품 자체가 남에게는 한치의 도움이나 신세를 원하지도 않았고 오로지 강직하고 절제된 성품으로 이고장에서 50여녀간 사셨으니 이웃들에게는 존경을 받았고, 외삼촌 또한 마을 이장으로서 그리고 그때 당시로는 보통 일반인들로서는 생각 할 수 없는 고졸학력 출신에 10년 이상의 마을 이장으로 재직하였으니 제법 그 위상이 높았다고 볼 수 있다.
- 내자신이 평소 느낀 외할아버지 감상은 이렇다.
- 어릴때부터 외손자이지만 돌아가신 선친의 유별난 성격으로 난 자주 외가집에 온 것 같았다. 물론 5살때까지의 선친과 모친의 생활 근거지가 주로 외가와 인접한 홍천, 김화, 인제,철원등지에 거주 하였으니까 부산보다는 양양에 자주 올 수 밖에 없었고 동시에 외가로 봐서는 나자신이 첫 손자이기에 비록 외손자이지만 귀여움을 독차지 한 이유도 있었던 것 같다.
- 물론 그때 우리나라는 엄청 경제 빈국이었고 농촌이야 말할 나위없이 빈촌 이었테지만 강원도 특유의 폭설속에 쌓인 기와집 굴뚝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외가 였던 것 같다. ( 지금 집에 있는 3살 때 외가집 뒤 언덕에 있는 소나무사이에서 찍은 사진과 외삼촌이 그당시 중고교를 다닌 것으로 봐서)
- 외조부께서는 청년시절 지금은 이북이지만 강원도 통천 출신으로 ( 현대그룹 정주영회장과 같은 출신인 것으로 봐서 동향 출신인 것으로 안다. ) 제법 가산이 풍족하고 튼튼한 집안의 외조모를 중매로 만나 결혼 하였고 빈한한 자기의 처신을 처가에 의탁 할 수 없는 자존심에 만주로 이주 하였다고 한다. 물론 그당시는 일제 강점기 시대이다.
- 맨몸으로 단신 이주하신 외조부께서는 특유의 근면성과 강직성에 의한 노동으로 제법 수월찬은 돈을 마련하여 1945년 해방을 맞이하여 4자녀( 세딸과 한명의 아들)를 이끌고 이곳 양양 정씨 집성촌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 막상 국내 이곳으로 정착하여 보니 집안의 큰집의 형편이 이루말할수 없이 곤궁하였고 명색이 장손이라는 조카가 학교를 가지 못하고 있음을 보고 생계에 필요한 약간의 논과 밭 장만이외의 최소경비를 남기고 일체 학비를 지원하였던 모양이다. (이런 점으로 봐서 외조부는 우리나라 전래의 강직한 유교적 틀의 사고를 가진 분 이었지 않나 싶다. )
- 물론 그로인하여 그 장손은 지금 제법 그런대로 부유하게 살고 있으나 도움이 되지 않고 아직도 그들의 부모 묘자리를 가지고 도움의 손길을 바라며 또한 상대적으로 이집안의 딸들은 초등학교도 겨우 졸업 할 정도의 학력만 마치게 하였다고 오늘도 외삼촌께서는 투덜거리시는 것을 보니 외조부에대한 외삼촌의 밉지않은 원망이 있어보일정도의 외조부 성격이었으며 나중 언급하겠지만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도 이와 관련해서는 똑 같은 심정인 것으로 난 알고 있다
- 그 외에 다음 사례도 있는데 외조부께서는 처가의 장인장모외 소수의 외척들의 시신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음을 보고는 몸소 지게를 이용, 시신수습하여 한 곳에다가 모아 산소를 마련하는 등 친가, 처가 할 것없이 집안 정통성 확립에 엄청 공을 들였다고 하니 과연 이런 분이 다른 곳에도 있을까 싶을 정도다.
- 그러니 돌아가신 외조모나 외삼촌, 우리 모친이나 이모들도 외조부의 말한마디 한마디에는 이견이 잇을 수 없었고 오로지 불만들은 속으로 삭이며 생활 하였으며 돌아가신 그날까지 꼿꼿하게 사랑방에서 좌정 하신 것이다. 물론 그때 외조부께서는 오른손 마비에의한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밤이외는 돌아가실때까지 단 한번도 낮에는 방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성정이 어떠했을지 상상이 갈 것이다.
- 이런 분이 성냥 한개비에 의한 화재로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었으며 그 슬픔 또한 대단하였던 것으로 기억나고 그당시 외조모도 한쪽 방에서 뚜덕뚜덕 곰방대만 물고 계셨던 것으로 상기된다.
- 그렇지만 다정다감한 일도 있었다.
- 1988년도이다. 그때 난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직장생활 할 때였고 지금 인천있는 동생이 홍천에서 수송병으로 군복무하고 있을 때였다. 1988년 1월1일 신정을 맞이하여 87년도 12월31일 밤차를 타고 강릉을 경유, 홍천 군부대로 동생을 면회를 갔었고 돌아오는 길에 외가에 들릴 목적으로 양양으로 향하였다.
- 몹시 지치고 힘들어 하던 동생에게 점심과 저녁을 먹이고 몇푼의 용돈을 쥐여주고 일어선 것이 오후 늦은 시각이었고 양양행 홍천출발한 버스가 폭설로 인하여 엉금엉금 기다시피 한계령을 넘어오는데 밤 11시가 되어서 양양읍에 도착하였으며 그곳에서 주문진이나 강릉행 버스를 이용해야 중간에 있는 외가로 올 수 있었는데 마침 속초에서 출발한 강릉행 마지막 버스도 폭설로 인하여 시간대가 지연되어 마침맞게 탈 수 있는 행운도 가졌다.
- 그러나 하조대에 하차한 시각이 밤 12시가 넘었고 그 시각에는 폭설도 폭설이거니와 일체의 교통수단도 인근 인가의 불빛조차도 없는 캄캄한 암흑세계 그자체 였으나 그나마 길바닥에 깔려 있는 눈으로 인하여 희미하게나마 길을 걸을 수 있어 양양읍에서 구입한 귤 한주머니를 지니고 터벅터벅 외가까지 걸어왔었다. 물론 중간중간 비틀비틀 넘어지거나 해서 엄청 시간이 걸렸지만 나또한 2년 6개월을 강원도 철원 군복무시절 눈과 부딪힌 경험으로 다행히도 외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캄캄한 밤중에 전부 피곤한 육신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져 있을땐데 어느 출입구로 해서 방으로 들어갈지 누굴 찾아야 할지 막막해서 한참 고심하였다. 왜냐하면 외가에 온다고 사전에 통지한 사실도 없는데다 갑작스럽게 그리고 캄캄한 밤중이니 다들 얼마나 놀래실까 싶었다. 고심끝에 지금은 사랑방이 일반 방으로 합쳐 졌지만 그당시 마루방 옆에 외조부가 기거하신 사랑방이 있었고 바로 옆방에 외조모 방이 별도 연결되어 있었으며 천장에 부착된 형광등 한개를 두방에 반반씩 걸쳐 연결된 구조인데 바로 외조모가 계시는 문 쪽에서 “ 외할머니” 라고 낮은 음성으로 불렀다. 세 번정도를 불러니 잠에서 깬듯한 외조부의 말씀이 “ 누구야” 라며 “누구 온 것 같은데” “ 불 캐”하는 동시에 외조모께서도 놀래일어나며 “누구냐” 하며 작은 소동이 났는 가 싶어 “ 인욱입니다” 하니 문이 열리며 두분 모두 놀래신 표정들이었다. “ 이밤중에 웬일이냐” 하시면서 아랫목 따듯한 자릴 마련, 이불로 감싸주시며 외삼촌을 깨워셨다. (얼마나 죄송하였던지 지금 생각하면)
- 이런저런 정황을 말씀 드리며 밤늦게 힘들게 찾아온 외손자를 따뜻하게 걱정스럽게 맞아 주셨던 그때 그시절의 아름다운 기억만이 남아있어 그때그분들의 따스한 눈길들을 더 이상 볼 수 가 없음을 상기할때마다 한없이 눈시울이 붉어 질뿐이며 향후 나의 미래에 나자신 스스로 닮아야 할 상(象)으로 스스로 채찍질 해본다.
- 그때 돌아가시고 삼일째 되던 날 외가에서 출발한 꽃상여는 십여명 마을 사람들에 의해서 운구 되었으며 가는 걸음걸음 도중 많은 아쉬움을 남기고 갈 듯이 멈칫멈칫 한 것으로 기억나며 나는 그때 상여앞에 만장을 들고 앞서 걸었던게 기억난다
- 묘자리는 외가 건너편 작은 외가집을 오른쪽으로끼고 계곡으로 조금 들어가면 이백여평 되는 산중턱 밭에( 그때는 감자밭) 있는데 뒤를 비롯한 삼면에 수목들이 촘촘히 들어서있고 앞은 확 튀여 있어 좋다라는 기분이 밀려오는 아늑한 곳에 외조모와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 외조모 께서 돌아가셨을때부터 오늘이전까지 찾아오지 못한 나의 불경(不敬)에 많은 죄스럼을 느꼈다.
- 참배후 외삼촌께서 주시는 음복주 한잔을 마시니 착잡한 심정에 눈을 어느 곳에 둘 수 가 없었다. 그때 감자밭은 이제 외사촌 및 손주들을위한 참외, 구슬토마토, 땅콩, 옥수수, 고추등 갖가지 과실수로 채워져 있고 외삼촌께서는 연신 밭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있다. 외숙모와 함께 이 밭을 일구는데 무척 힘들었었리라. 왜냐하면 대학시절 여름방학때 이곳 감자밭에서 한나절 외삼촌 부부와 함께 감자를 캔 일이 있었는데 그때 무더위 및 벌레등으로 엄청 애를 먹었던 일이 아련히 생각났기 때문이다.
- “이제 모친과 동생과 아내와 나의 아들과 딸과 함께 이 묘소를 성묘하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지난날 은혜에 대한 잘못된 처신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동시에 앞으로는 가끔식 회고하고 들리기도 하면서 잊지않도록 노력 하겠습니다. ”라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섰다.
○ 08시 작은 외가방문
- 성묘하기전 지나쳐 왔던 입구 작은 외가댁을 방문하였다. 외숙모께서 어머니를 알아보시고 무척 반갑게 맞이하고 나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다. 많이 늙으셨다. 세월의 흐름에 이기는 장사 없다더니. 여전히 집앞에 있는 눈두렁 커다란 나무밑에는 평상이 놓여져 있는 것은 예전과 똑 같았고 그곳에서 이런저런 대화들이 오간다.
- 작은 외숙부께서는 모친보다는 연배다. 그러니까 올해 70십정도의 연세인데 바로 집앞에 있는 논에서 잡초제거 작업을 하고 계셨다. 이 무더위에 해충방지용 고무옷에 밀짚모자를 쓰고 작업하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아무리 불러도 묵묵히 일만 하신 것을 내가 가서 친히 모시고 왔다. 나의 이름을 여전히 기억하며 불러 주시니 황망할 따름이다. 이집 큰 딸이 나와 동갑이니 그럴 것이고 어릴때는 같이 많이 놀았기에 잊지는 않은 모양이셨다.
- 10시경해서 이별을 고하고 나오는데 기어이 꼬기꼬기 접어 두었던 만원권 2장을 차창안으로 밀어넣어 주신다. 생전 처음 본 손자손녀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황송하다.
○ 11시2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설악동과 옥수수이야기)
- 외가로 돌아온 우리 식구들은 외삼촌과 동반하여 설악산 나들이에 나서기로하고 급히 차를 설악산으로 몰았다. 설악산 케이블카를 보기는 하였지만 한번도 타보지를 못하였던 나와 우리 식구들을 위해서였고 외삼촌 또한 십 여년전에 한번 타 본일이 있다고 할 정도였기에 대청봉까지의 산행은 현재상태에서 무리고해서 갔는데,
- 속초 못 미쳐 설악산 진입로로 가던도중 설악촌부터 일렬로 늘어져있는 차들의 행렬로 인하여 엉망진창이었다. 그런데 한중간에 어중쩡하게 끼여버린 우리도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모처럼 외삼촌과 함께 하는 하루 인데 망쳐버린 기분이다.
- 그렇지만 십오년전의 기억과는 완전히 다르게 차창밖으로 비치는 설악의 산세사 이건 장난이 아닌 것이다. 설악의 위력에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듯한 날씨에 설악의 고봉정상에 드리워진 안개에 의하여 신비감을 자아내는 이산의 풍경에 벌어진 입을 다물수가 없어 흥분감마저 들었다. 전식구들이. 또한 차가 밀리는 속에서도 차위로 뒤덮고 있는 수목들의 향연과 진입로 좌측 하천가에 쭈욱 줄지어선 주목송- 약 이삼십년정도의 수령_이 한층 멋을 내고 있어 생각하였던 설악산은 산이 아니었다.
- 그때는 아마 이런 수목들이 한참 심어져 가꾸어 졌던 모양이다. 완전 들판이었던 설악동 주위가 이젠 아프리카에서나 봄직한 밀림으로 변하였고 설악동의 건물들은 연륜을 길게 자아내는 것이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많은 감동이다. 감동!
-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오늘 하루종일 차안 신세다. 차안에 같혀있는 애들은 배고프다고 난리다. 설악산이니 경치니 감상이니 필요는 없고 서서히 짜증만 낸다, 부산과 달리 아침을 일찍 먹었으니 허기가 지는 모양이다. 아침일찍 숙모가 가마솥에서 삶아 챙겨주신 옥수수를 나누어 주니 꿀맛인 모양이다. 도저히 무리다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중간쯤에서 외삼촌의 제안으로 차를 돌렸다. 무수한 관광객으로 입장해봤자 별볼일 없을 성 싶다. 차를 되돌려 나오는데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다. 내일 일치감치 다시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점심을 위한 장소를 찾는다. 가는 도중에도 애들은 여전히 옥수수를 씹고 있다. 맛이 있어 먹는것인지 배가 고파 먹는 것인지. 맛있다고 하긴하는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가 없다.
내가 생각해보니 놀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먹는 것 같다. 외가 소를 욕할게 아닌 것 같다.
- 이제 옥수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외가가 있는 강원도 영동지역은 예전에는 지금처럼 옥수수가 식용으로 할용도가 매우 낮았다. 주로 소 사료로 사용되곤 하였고 요즘처럼 재배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동해안 해수욕장이 곳곳에 생겨나면서 외지 관광객들이 그들의 주거지에서는 쉽게 구하지 못하고 제법 생소하면서 옥수수의 고향인 강원도의 특산품이기도한 옥수수를 주전부리로 삼으면서 이곳 주민들이 옥수수의 활용에 관심을 보인 것이다. 물론 이로인하여 경제적 수입 또한 짭짤하였으니 너도나도 여름철이면 옥수수재배에 열을 올린다. 아무래도 벼농사라고 해봐야 일년 내내 고생해야하지만 여름 한철, 그러니까 백일정도 하면 가능하니 강원도에서는 여름철 농한기 상품으로서는 안성맞춤인 것이다.
- 상대적으로 강원도 영서지방, 홍천이나 인제,김화,원주,춘천인근에서는 옛날부터 식용으로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홍천에서는 옥수수 전문 연구시험장이 있을 정도이니 영서지방에서는 흔하지마는 귀히 여겼던것으로 보인다. 같은 강원도지만 미시령,한계령,진부령, 대관령등 우리나라에서는 상위에 들 정도인 산과 고개로 분할된 영동과 영서지방의 생활차이가 제법 많이 차이 나는 것을 볼때 작은 땅덩어리지만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으로 사는 우리 나라임을 느낀다. 물론 언어사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영서지방은 주로 서울 경기지역과 인접한 관계로 거의 표준말을 사용하지만 영동지방은 완전 토박이 강원도 말이다. 한마디 해보면 이렇다.
- “ 지들이 알면 울매나 안대요. 나니깐 상대가 되지 지깐것들이 뭐래유” 라고.
- 울 애들은 첫날 나와 대화하는 외삼촌의 말씀을 놓고 이랬단다. 아내에게 아빠는 외삼촌 말을 알아듣고 대화하는 것이냐고. 자기는 도무지 무슨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고 하면서. 거의 표준말, 충청말, 경상도말이 혼재된 것이 아닐까 싶다.
- 외삼촌이 밭에 가꾼 옥수수를 거두어오면 손수 옥수수털과 간단한 손질후 외숙오가 전용 가마솥에 충분히 삶아내는데 이에 많은 노하우가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모친도 아내도 집에서 종종 삶는데 충분한 맛을 내지 못한다고 하니 상품 가치를 낼려면 고기술이 필요한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
- 삶은 것중에서도 질이 좋은 옥수수를 별도 선별하여 외숙모께서 인근 해수욕장으로 가져가 노천에서 판매하는데 오후 3,4시 정도면 전부 팔고 들어오신다 . 물론 가져갈때는 무겁기에 외삼촌께서 직접 물건들을 지정장소에 미리 두고 오신단다. 이렇게 옥수수를 활용한게 내가 알기로도 이십년 조금 안되는 것 같다.
- 손질하고 남은 옥수수털은 그 삶은 국물이 외지 사람들에게 당뇨병들 노인성 질환에 좋다고 하여 옥수수털만 별도로 보관하고 나머지 껍질과 질이 떨어지는 옥수수는 외양간 고 차지다. 우리 민정이는 그것을 소에게 준다고 연신 갔다왔다 하였다.
- 아뭏던 옥수수의 위력은 대단하다. 강원도의 웬만한 관공지에서는 십중팔구는 옥수수를 물고 다니는 모습들 볼 수 가 있다. 우리만 물고 다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는 옥수수임에 틀림없다.
○ 13시 양양 인근 중식 ( 강원도 메밀맛)
- 양양읍을 뒤로 돌아 깊숙한 곳을 지나치다보니 닭과 오리를 방사한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대개 농촌을 근거지로하는 식단이 그렇듯 이곳도 흡사하다 . 부산인근 식당처럼 각종 항아리를 전시하고 짚으로 얼기설기 메어놓은 처마에다 약간은 어슬픈 작은 물레방아를 배치하고 닭백숙. 오리고기등에 강원도 특산품의 하나인 메밀종류가 있다. 특히 메밀은 이효석의 “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한 것처럼 봉평 메밀이 유명한데 강원도 전체가 고랭지 관련 농산물을 많이 재배하는 관계로 이곳 또한 메밀이 특산품이다.
- 메밀국수와 메밀전을 일괄 주문, 식사를 하였는데 나는 곧 후회하였는데 다들 엄청 맛있게 먹는다. 표시는 내지 못하였지만 엄청 매운 맛이었고 게다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은 중국식 향이 낫기에 주문한 당사자로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억지로 먹었다.
- 부산에서 메밀국수를 먹든지 서울에서도 메밀국수를 먹어 봤지만 영 그맛이 아니었다. 이건 완전히 원판 메밀인 것 같다. 씹어도 씹히지도 않고 부석부석한게 목구멍을 넘겨도 잘 넘어가지도 않고 목에 걸리는 것처럼 매rM럽지도 않다. 세상에 무슨 맛으로 이걸 먹나 싶다.. 좌우간 세상 처음으로 먹어보는 특이한 맛이다. 무슨 맛으로 이걸 먹나 싶을정도다,앞으로는 절대로 내가 주문하지 않을 것이다. 전부 잘 먹으니 다행이었다.
○ 14시 30분 오색약수 방문
- 그냥 외가로 가기에는시간적으로도 그렇고 하여 오색약수로 가기로하고 차를 몰았다. 그러니까 양양읍에서 인제, 홍천쪽 으로 사십분정도 소요되는 거리다. 십오년전에 아내와 같이 갔을때는 양양읍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 갔던 길이다. 직접 승용차를 몰고 한계령으로 들어서니 일대가 말할수 없이 장관을 연출한다. 어차피 한계령은 외가를 떠나 부산 귀향시 경유 할 것이기에 내일로 미룬다.
- 한계령 진입 직전 도로 인접에 위치하고 있는 오색약수는 관광지다. 지금은 이를 활용하여 오색온천으로 개발하여 이 깊은 산중에 또 하나의 명소를 만들기위한 노력즐이 곳곳에 묻어남을 볼 수 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승용차가 만원이다. 겨우 비집고 오색 약수 발 입구에 주차하였다.
- 오색약수도 예전의 기억과는 완전 딴 판이었다. 십오년전에 아내와 같이, 십육년전에는 친구들과 같이 야영하였던 야영장이 지금 장소는 그대로인데 용도가 주차장으로 변하였다. 야영장 자체가 없어 졌고 오히려 오색약수에 이르는 약 300미터 정도는 전부 식당, 상가등으로 도배되어 있다. 완전 엉망이다. 단지 설악동과 마찬가지로 수목들이 엄청 울창 한 것 빼놓고는 상술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 오색약수 [五色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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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들과 아내와 이곳에 왔을때는 1박 야영을 한관계로 이곳의 묘미를 제대로 느꼈는데 아무래도 이른 아침이 좋고 비가 겹치면 더욱 좋은 곳이 이곳인데 화창한 대낮에 오니 그 맛이 아무래도 떨어진다. 아침일찍 오색약수를 지나 일정거리의 등산로를 계곡을 끼고 돌아오면 무척 좋았던 것이었다.
- 외삼촌과 식구들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고을 헤집고 겨우 오색약수 맛만 보고는 돌아섰다. 그런데 민정이는 좀체 가지를 않는다. 계곡의 맑고 차디찬 물이 발걸음을 떼지 못하게 하는 표정이다. 그냥 물에 들어가서 놀아라고 허락한다. 마지못해 들어가는 눈치지만 혼자 헤집고 논다. 물만 보면 거의 몰입하는 애다. 하기사 이 오색계곡의 물은 완전 1급수를 넘어서 특급수이다. 명경지수(明鏡止水) 가 바로 이곳이다. 그냥 입에 담아 넣어도 좋다.
( 사진 첨부 )
-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쩌랴! 저 하고 싶은데로 해줘야지 싶다. 이아름다운 계곡을 죽을때까지 눈에다 심어 두어야 할정도이다. 그런 상관관계는 없이 우리 딸은 물속에서 난리고 아들놈은 이제 컸다고 물속에도 제대도 가지 않는다. 매번 그냥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나라 사람이다. 저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으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문이다. 나도 저런 나이시절 그랬을까 싶다. 완전히 자기만의 세계를 향유하는 것 같다.
- 결국 입은 옷을 다 적신 민정이를 구슬려 재촉하는 외삼촌을 따라 오색을 빠져 나왔다.
○ 16시 30분 냇가 고기잡기
- 생각보다 외가로 귀환한 시각이 빠르다. 마루방에서 소주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 도중
돌아가신 아버지를 화제삼아 이야기하는 도중 살아생전 이곳에만 오면 마을 앞 개천에서 물고기를 잡아서는 매운탕, 어죽만들어 재미를 엄청 즐겼다는 외삼촌 말씀에 외숙모, 모친을 남겨두고는 전부 냇가로 향하였다.
- 고기잡이에 대한 추억은 많다. 고기잡는 만큼은 외삼촌도 아버지한테 배웠고 매운탕이니 어죽 끓이는 것도 동시에 배웠을 것이다. 아버지는 부산에서도 틈만 나면 나와 동생을 데리고 지금 두구동 임기부락 하천에 고기 잡으러 자주 갔었다. 그당신은 어떻게 해서 그것을 즐겼으며 어떻게 고기잡는 방법을 익혔는지 나는 모른다. 그렇지만 기술은 대단하였고 나와 동생은 그런 아버지만큼은 엄청 존경하였다. 나름대로 대단한 기술을 가졌다고 생각 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렇게 잡아보질 못한다.
- 여하튼 그런 솜씨를 아버지는 이곳 처가에 와서도 발휘하였으며 한때는 외삼촌도 자주 즐겼 던 것인데 외숙모의 만류로 최근에는 드문 형국인데 오늘 마침 화제가 되어서는 외삼촌은 애들처럼 반도 (그물을 대나무로 양쪽 끝을 지지하게금 묶어 만든 고기잡이용기구) 2개를 들고 자못 애들처럼 신바람을 내며 나섰다. 아마도 외삼촌께서는 나와 우리 애들의 놀이를 위해서 그렇게 자청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다 .
- 나와 외삼촌을 제외한 아내와 여동생, 애들은 처음 해보는 일이라 엄청 호기심이 발동한 것 같았다. 그하천은 시멘트로 포장이 되기전 완전 자연수로서 말그대로 1급수 수질이었는데 외사촌들과 함께 수영을 하는등 자주 찾은 기억이 나는 하천인데 지금은 농업 용수 확보차원에서 완전히 시멘트로 공사화 하였기에 옛날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싶어 모두들 덥볐다.
- 물이 가물거나 아니면 제대로 물을 상류에서 가두어 둘때면 고기가 없는데 여름에는 그런대로 우기가 많기에 수량도 풍부하여 제법 고기들이 많다고 하였는데 직접 내려가보니 군군데 재빠르게 움직인다.
- 어찌나 빠른지 총알보다도 빠르고 사람보다 영리해서는 보통 작전으로는 잡을수 가 없었다. 게다가 이곳도 물 이 아니던가. 우리 민정이는 고기 잡을 요량이 아니고 말그대로 물놀인데다 경덕이놈은 시냇물에 옷 적실까 도사리니 외삼촌 혼자서는 역부족이다. 또한 물이끼로 인하여 하천 바닥에 깔려있는 돌은 어찌나 미끄러운지 중심도 체 잡질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슬리퍼만 걸친 삼촌은 그연세에도 불구하고 단한번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
- 나와 경덕이 민정이는 고기를 잡느게 아니고 영판 고기에게 잡히는 모양새이고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되질 않는다 싶어 아들놈을 야단치니 그대서야 저도 재미있는지 제법 덤벼든다.
- 잡는 방법은 이렇다. 멀찌감치 서서 보면 고기들이 떼를지여 저희들끼리 유유히 놀고 있다. 중간 숨을 쉬기위함인지 공중으로 간간히 솟구치는 놈도 있다. 그런 동태 파악후 외삼촌이 시냇물 적당한 길목을 확보, 그물을 치고 나머지 우린 먼곳으로부터 고기를 쫓아 그물쪽으로 몰아가는 방식인데 몰때 그냥 몰면 되지 않고 작은 소동을 부려야한다. 조용히 하다가는 전부 도중에 사라지기에 엄청난(?) 체력과 운동신경이 요구되는 것이다. 게다가 밑에 깔려있는 돌을 전부 곧추세워야하며 맑디맑은 물은 흐린물로 만들어 고기를 정신 못차리게끔해야 제대로 잡힌다.
- 준비해서 출발! 하면 나와 경덕이 민정이는 난리다, 와 하며 물을 밀고 치고 들어가는데 이건 장난이 아니다. 나야 이런 놀이를 해봤지만 처음 해보는 우리 애들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옷은 흙탕물로 범벅이되고 머리는 흥크러지는등 온동네가 떠날 정도다.
결국 나는 나되로 엄청나게 쓸어졌고 경덕이 민정이도 엄청 빠졌다가 일어나곤 하는데 예상되로 고기잡기가 쉽지 않는다. 이장면을 보는 아내와 애들 고모는 같이 웃고 하며 계속하여 하천을 누비는데 피곤도 잊어 버리고 고기를 찾는다.
- 우리 경덕이에게 그물을 한번 맡겼더니 주체하지 못하고 연신 처박는다. 오히려 그물안으로 빨려들어간다. 아니 어찌된 판인지 덩치가 산만한 놈이 정신을 못 차릴정도로 중심 잡지 못하니 웃음이전에 미칠 지경이다, 아니 그리도 운동신경이 드뎌 우짜겠노? 하기사 처음 잡아보는 기군데 어련할까. 그렇지만 생각이외다. 일마이거 부산가면 제대로 운동시켜야 겠다.
- 거의 한시간동안의 결과물은 큰 것은 액 15센티에서 작은 것은 5센티에 이르는 갈겨니, 피라미등 수십마리에다 1급수에만 산다는 모래무지 다수를 잡았는데 제법 괜찮은 조과라 하신다.
- 어둠이 밀려 오는 관계로 외가로 돌아와서는 이고기들을 가지고 외삼촌께서 직접 손질한다. 그리고 몇 번을 휑궈내고 말리고 밀가루를 입혀서는 매운탕을 끓였는데 이고기들을 반으로 잘라놔서 그런지 애들은 고기는 먹지 못하고 국물만 먹는다. 그러니 자연 고기는 외삼촌과 나 차지다.
- 맵지만 옛날의 추억과 재미와 강원도 자연을 함께 들이키는 이맛! 정말로 좋았다. 아마 애들은 이추억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의 외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 너무 많은 저녁을 해서인지 밥상을 물리고 바람한점없이 구름만 잔뜩 끼니 엄청 후듭지근하여 저녁나절 현북 초등학교( 학생수 7명이란다)와 인근 하천 제방뚝을 산책하였다. 그런데 워낙 사람들이 걷지 않았는지 온통 거미줄이 앞을 가로 막는다. 도대체 시작과 끝을 알 수 도 없고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제방뚝길을 계속 막아섰지만 그래도 걷는다. 아마 모친은 옛날 어릴때 생각이 나서일까. 계속 걷자고 하는데 나는 피곤이 몰려왔다.
- 이 밤중, 논바닥이 있는 한가운데 괴물같이 버티고 서있는 고속도로 교량이 대형크레인과 맞물려 조명등을 켜고 밤공사를 하고 있는데 더 이상 보기가 싫었다. 얼마나 고속도로가 중요하면 저리도 밤새워가며 이 한적한 농촌의 밤하늘과 밤공기, 그리고 하루종일 농사일에 심신이 지친 마을 주민들의 잠까지 설치게 하며 공사하는지 진짜루 인근 사격장에 있는 총알이 오발되어 이곳으로 날아왔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 아직도 밀어붙이고 빠르게 아주 빠르게라는 우리나라의 공사는 그만큼 빠르게 나라를 망치고 있음을 그들은 모른다는 말인가.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개통한 고속도로는 더 이상 쓸모 없어 다시 철거해야한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비행택시에 밀려 반드시 철거되는 그날이 올 것임을 당신들은 진정 모르는 것인가.
-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지는 농촌이 위급하다 못해 사망 일보직전이다. 인근 중국만 하더라도 지방 고속도로 하나 만들어도 고급장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삽과 곡괭이로 십년이상의 공기글 가지고 공사하는데 떵덩어리도 좁은 우린 왜 이렇게 설치는 걸까. 한심한 일이다.
- 어서 빨리 외가로 가서 시원한 물 뒤집어 쓰고 자야겠다. 그래도 양양 이곳의 밤하늘 공기는 맑고 깨끗하고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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