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차 (8월9일)
- 06시 기상
- 08시1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 08시30분 권금성 케이블카 탑승
- 09시 권금성 등반(8부능선)
- 09시30분 인근 약수암 방문( 권금성 휴게소 밑)
- 10시 신흥사방문
- 11시 신흥사 출발
- 12시 05분 통일전망대 신고소 도착
- 12시 50분 통일전망대도착
- 13시50분 통일전망대출발
- 14시 10분 중식( 간성)
- 15시 화진포 도착( 김일성 별장 및 이승만 별장 관람 및 화진포일주)
- 15시 40분 송지호 도착 및 관람
- 16시 20분 양양읍내 시장도착
- 17시 외가도착, 삼겹살파티 및 음주, 11시 30분 취침
□ 동해안 7번 국도 최북단 통일전망대와 애끓고 서러운 삶을 기리며( 3일차)
○ 08시1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 어제의 실패를 참고, 오늘은 아침일찍 준비하여 외숙모께서 마련해주신 옥수수를 들고 설악산을 향하여 외가를 나섰다. 여전날씨는 찌푸리고 있는데 이곳외가에 오고 난 뒤부터는 하루종일 쾌청한 날씨는 보지 못하였다. 여러곳 나들이하기에 좋은데 시각적인 이미지 고찰에는 불만족이다. 하지만 비에 적시는 설악의 바위와 수목들은 또 다른 감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믿음을 안고 설악산 주차장까지 단번에 도착하였다.
- 외가에서 출발해서 약 25분에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니까 외가도 거의 설악산 주변 언저리에 위치한다고 보면 되나 법적 국립공원 경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어제와 달리 진입로에는 거의 차량들이 없었으나 주차장에는 이미 많은 차들이 있었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은건지 아니면 우리처럼 어제같이 낭패를 보고 간 사람들이 두 번다시 실패하지 않을려고 마음을 다져 왔는지 모르겠으나 생각보다는 많은 차와 인파다.
- 오늘은 오차피 많은 도보를 해야하는 날이다. 각자가 끝까지 챙겨야 할 소지품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우고 발걸음을 재촉하여 케이블카 탑승구쪽으로 식구들을 채근시켰다. 그래도 이른 아침이라 생각이외로 케이블카 운행영업이 진행되고 있어 대기시간없이 올라 탔다.
○ 09시 권금성 등반(8부능선)
- 3번정도 설악산에 왔지만 케이블카 탑승은 단한번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떤 기분일까. 그리고 부산 금강공원 케이블카와는 어떤 점이 다를까하고 탔는데 케이블카에 맞추어 오르는 케이블 가는 방향을 등을지고 뒷쪽 권금성에 이르는 산세를 말할 것 같으면 수려한 풍광이 줄지어서있는 주변 산봉우리와 같이 예사롭지 아니하였고 오른쪽 차창으로는 동해안 수평선과 거의 맞다아 있는 듯한 속초시내가 희미한 안개속으로 펼쳐져 있었으며, 왼쪽과 앞쪽에는 신흥사, 울산바위의 정상들이 버쳐 있고 저 멀리 대청봉까지 이르는 암벽과 계곡등이 끝없이 시야에 빨려 들어 왔다.
- 권금성 밑 휴게소에 도착하고 보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휴게실에서 바라보는 설악산과 그 주변 경치에 가슴속까지 쾌청함을 느낀다. 약간의 빗방울과 은근슬쩍 드리워진 산봉우리의 안개가 합작품으로 승화되어 흡사 전시장에 걸쳐있는 대형 풍경사진처럼 펼치니 과연 이곳 권금성 케이블카 탑승의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다.
- 우리애들은 여지없이 배고프다고 한다. 아니 아침식사 한지 2시간도 채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오래만에 휴게실내 매장에서 풍기는 냄새와 스냅식품에 눈길이 갔던 모양이다. 하나씩 물리고 난 커피한잔을 아내와 나누어 전망대용 망안경도 보고 난뒤 뒤쪽으로 난 권금성으로 향하였다. 보통걸음으로 30분정도면 충분히 가는 거리인데 그렇게 수월치는 않아 보였다. 특히 모친같이 연세가 있는 분들은 조심성이 요구된다. 간간히 내리는 비를 맞고 정상 주변 8부능선이 온통 바위들뿐이다.
※ 권금성 [權金城] |
강원 속초시 설악동 남쪽에 있는 석축산성으로,
둘레 약 3,500m. 설악산성 ·옹금산성(擁金山城) ·토토성(土土城)이라고도 하며, 성벽은 거의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다. 설악산케이블카가 다니는 앞쪽, 깎아지른 듯한 석산 위에 있으며, 해발 800m의 성 정상에는 80칸에 이르는 반석과, 실료대(失了臺) ·방령대(放鈴臺) 등이 있다. 신라 때 권 ·김 두 장군이 난을 피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이 있고,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이 침입하자 인근 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난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적어도 고려 말 이전부터 존속한 산성임을 알 수 있다.
- 정확하지는 않지만 예전부터 케이블카 운행선 밑으로 은신처였던 조그만 동굴이 있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수목들에 가리웠는지 지금은 볼 수 가 없고 여기저기 벼랑끝으로 접근하니 엄청난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흡사 나같은 이는 날아갈 것같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겠는데 우리애들은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산성이 있었다고는 하나 예전 것은 없고 그냥 모양만 대충 있는데 아마 기념 사진 촬영 배경용인 것 같았다. 이런 힘든 외봉에 산성까지 쌓아 대항하였다고하는 그때 그당시 선조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사람 지탱하기도 어려울정도로 바람이 불고 눈이라도 쌓이면 과연 어떻게 운신하였을까라는 의문이든다. 이곳저곳으로 등산로도 있었던 같은데 관리사무소에서 등산로 잠정폐쇄 현판이 설치된 것으로 미루어 한때 등산로로 활용이 많았던 것 같다.
- 여기저기 내려다 보이는 주위의 경치를 배경으로 온통 기념 사진 찍느라 자리다툼이 심하고 정상까지 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등살에 정신이 하나도 없다. 이곳에서 정상까지는 외길인데 깎아지를듯한 바위길이며 매우 위험하게 보였는데도 시골에서 단체로 온 듯한 연세지긋한 분들이 저마다 올라간다고 성화다. 가만보니 음주 기분인 것 같은데 대책이 써질 않는다. 아무리 정상 이라지만 기분이 별로다. 우리 식구들끼리 이곳저곳에서 간단히 사진촬영하고 내려온다.
( 사진첨부)
- 권금성 아래쪽으로 조그만 암자가 있었는데 혼자서 내려가는데 제법 힘들다. 이곳에 암자가 있는것도 그렇지만 이곳까지 오는 불자들이 대단하다. 아담하니 스님 한분도 보였는데 바로 암자왼편으로 케이블카 운행선을 바로 밑으로 폐쇄된 등산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 많은 등산객들 피난처나 휴식처로도 활용된 듯하다. 암자 앞에는 수령 300백년정도되는 소나무도 있었는데 제법 연륜있는 절인갑다.
○ 10시 신흥사방문
- 케이블카 대기장에 오니 본격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온다. 승강장에 도착하니 엄청 많은 사람들이 대기장을 채워고 있는데 매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면 케이블가 배겨 날지 의문이다. 아마 엄청나게 튼튼한 케이블카 인 것 같다. 여름 휴가시즌이 이토록이면 가을 단풍철에는 더욱 터져 나갈 것으로 보아 대단한 설악산이다
- 울산바위, 흔들바위, 대청봉은 말할 것도 없고 인근 폭포 방문은 아쉽지만 다음기회로 미루어야 겠다. 울산바위 입구에 위치한 신흥사 들목에 대형 통일청동대불이 조성되어 있어 가는데 지나가는 기습폭우가 쏟아진다, 인근 상점 처마밑으로 잠시 피해있는데 촉촉하게 내리는 설악산이 일순간 조용하니 침묵의 공간이 된 듯하다.
※ 신흥사 [新興寺]
강원도(남한) 속초시 설악동(雪岳洞) 설악산에 있는 사찰로
1984년 6월 2일 강원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다. 《사적기(寺蹟記)》에 따르면 653년(신라 진덕여왕 7) 자장(慈藏)이 창건하고 석가의 사리(舍利)를 봉안한 9층사리탑을 세워 향성사(香城寺)라고 불렀다. 고기(古記)에 자장이 637년(선덕여왕 6) 왕명으로 당(唐)나라에서 불도를 닦고 귀국하여 건립한 사찰이라고도 전한다.
이 향성사는 701년(효소왕 10) 수천칸(間)의 대사찰이 하루 아침에 소실되고 앞뜰의 9층석탑도 화재로 파손되어 3층탑만 남았다. 그후 의상(義湘)이 이곳 부속암자인 능인암(能仁庵) 터에 다시 절을 짓고 선정사(禪定寺)라고 하였다.
선정사는 1000년간 번창했는데, 조선 중기 1644년(인조 22)에 다시 소실되고 말았다. 선정사가 불타자 많은 승려가 떠났으나 운서(雲瑞)·연옥(連玉)·혜원(惠元) 세 승려만은 유서 깊은 절이 폐허가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재건을 논하던 중, 하루는 세 승려가 똑같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향성사 옛터 뒤의 소림암(小林庵)으로부터 신인(神人)이 나타나 이곳에 절을 지으면 수만 년이 가도 삼재(三災)가 범하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그래서 다시 절이 세워졌으며, 신의 계시로 창건하였다고 하여 신흥사라 부르게 되었다. 불상은 선정사 때 봉안된 것으로 의상이 직접 조성한 3불상의 하나이다. 당시 지은 법당·대웅전·명부전·보제루·칠성각 등의 건물이 현존한다.
중요문화재로 보물 제443호인 향성사지 삼층석탑과 그 밖에 순조의 하사품인 청동(靑銅)시루와 범종(梵鐘), 경판(經板) 227장,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이 있다.
- 신흥사가 유명세가 있는게 아니고 설악산이 있는 관계로 유명하게된 절 인데 다른 절과 비교하여 그리 특이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에는 이곳 절을 경유, 울산바위까지 등산로가 있었는데 지금은 절밖으로 등산로를 변겸함에 따라 대웅전을 제외한 절 구조가 조금은 변경된 것 같다. 조금전에는 기습폭우가 치더만 이젠 햇볕이 짱짱 내리쬐는 불볕 햇살이다. 민정이는 완전히 땀에 절여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 사찰내 약수터에서 대충 씻고 밖으로 세심교를 지나 입구에 있는 바위에서 잠깐 쉬었다. 무척 덥다. 옥수수를 한개씩 물고 휴식을 취하는데 민정이가 호박엿을 샀는데 영 본것과는 딴 판인 모야이다. 조금 먹다가 처치 곤란이다.
- 주차장에 오니 완전히 만원이고 발디딜 틈도 없다. 우리차는 일찍 온 관계로 가장 구석진곳으로 밀어져 있다. 일찍 온것도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나 보다. 거의 5대 정도의 차량을 다른 곳으로 돌린 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외국에 가본 나는 그 어떤 경우에 어떤 관광객들이 몰려와도 이런 경우를 한번도 본적 없는데 우리나라 관광지는 가는 곳마다 사람과 승용차로 이렇게 얼키고 설키고 하여 왕짜증만 불러일으키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보다 세밀한 개선점이 필요로 한다.
○ 12시 05분 통일전망대 신고소 도착
- 설악동을 빠져나오며 펼쳐진 설악동 진입로의 풍광에 다시한번 매료되면서 서둘러 통일전망대로 향하였다. 이곳 고상 통일전망대는 모친과 인천동생이 1986년도에 부친 생존시 외가 식구들과 같이 한번 갔었다고 하는데 나자신이야 가지는 못했다. 물론 철원 군복무시절 철원 소재 전망대, 대학시절 집체군사훈련시 문산 소재 도라산 통일전망대는 간 적 있지만 처음이다.
- 굳이 고성 통일전망대를 가기로 한 내심은 올해가 해방 60주년인 해이고 또한 815광복 기념일이 곧 오는데 내가 속한 단체의 기념행사에는 못 갈것같기도 하였고 애들에게 우리 조선의 남북 분단상황에 대한 겉햝기용이지만 현장체험 교육 의미를 목적으로 계획하였다.
- 조금 지체되지만 식사는 통일전망대를 방문하고 난뒤 볼 요량으로 고성쪽으로 몰았다. 이제 곧 동해안 최북단이자 남한 최북단인 고성쪽으로 간다. 가는 굽이굽이 길목마다 오른쪽으로는 하얀 백사장이 수평선과 맞닿을 듯이 펼쳐져 있고 또한 우리 분단현장을 보여주는 철책선 또한 평행선으로 펼쳐졌다.
- 철책선의 의미와 철책선에 꽃혀져 있는 흰색, 빨간색의 표찰과 군인 근무초소에 대해서 애들에게 중간중간 설명을 하고 7번 국도 도로 중간중간 괴물같이 쌓아져있는 콘크리이크 방벽, 터널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 해주었다. 철원 군복무시절 GOP 근무시 철원 땅꿀 근무, 철책근무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새삼스러운 풍경이 아니지만 애들에게는 처음보는 풍경경인 동시에 남북한의 치열하였던 우리나라 역사 관련해서는 전혀 모르기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되었으면 하는데 어느정도까지 효과가 있을련지는 나도 확신하지 못한다 .
- 설악산, 그러니까 속초 기점으로 해서 통일전망대 신고서까지는 약 사십분 정도 소요됬다. 아무래도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에 가까울 수록 군부대, 군차량, 군인들이 많이 눈에 들어오고 또한 분위기 자체가 다른 곳과 틀림을 애들은 느끼는 모양이다. 무장 군인들이 군데군데 초소 검문근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 12시 조금 되어 도착하니 이곳도 인산인해다. 시각이 점심 시간인데도 그렇다. 과연 남북한사이에 얽힌 의미를 보러 왔는지 아니면 그냥 관광지로 알고 왔는지 모르겠으나 좋은 의미쪽으로 해석하고 싶다. 이곳에서 간단한 출입신고 및 안보교육을 받는데 이는 다분히 형식적이고 민통선 안쪽에 있는 통일전망대 인파를 관리용인 것 같았다. 안보교육이래봐야 교육자을 보니 예전 군사정권 시절에는 엄청 까다럽게 한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최근에는 관리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것처럼 시설 자체가 노후화되어 엉망이다. 교육장에 앉아 있는 시구들을 이끌고 그냥 민통선으로 들어갔다.
- 가는 도중에는 여기저기 남북교류와 통일을 준비하는 광경들을 볼 수 있었다. 민통선 가까이에는 최근 유행한 고속철도형의 대형역사가 현대, 삼성의 대형건설 간판을 달고 진행중에 있었으며 새로운 도로와 철로 기초 공사현장들이 빈번하게 눈에 뛰였다.
- 민통선에서 신고증을 검문 무장군인에게 보여주니 민통선 운행차량 증명용 표찰을 준다 . 차량 앞면에 붙이고 들어서니 식구들이 제법 조용해진다. 그래도 다들 긴장이 되는 모양이다.
○ 12시 50분 통일전망대도착
- 이윽고 통일전망대 주차장에 들어서니 등더위로 땀이 촉촉이 베인다. 땀이 유난히 많은
딸은 이미 벌겋다 . 또 한참을 올라간다. 전망대라 그런지 높은데 있다. 전망대는 꼭 높은데 있어야 되는 모양이다. 연이어 새벽에 일어나서 그런지 더위도 더위지만 피곤함이 푹푹 밀려온다. 전부 귀찮을 정도다 . 그래도 내색은 못하겠다. 휴전전은 잘보이지 않았다. 태양은 엄청 내리 쬐고 잇지만 아직도 남방한계선 저쪽너머 금강산 해금강 , 삼일포 쪽에는 짙은 안개로 시계가 많이 확보되지 않아 아쉽다. 화창한 날이면 멀리 삼일포까지 자세히 볼 수 있었을 텐데.
※ 통일전망대 [統一展望臺, Tongil Tower]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明坡里)에 있는 전망대로,
동해안 지역의 금강산비로봉(毘盧峰:1,639m)과 해금강(海金剛)을 바라볼 수 있고, 나아가 반공교육에도 도움을 줄 목적으로 1983년 7월 26일 착공해 이듬해 2월 9일 준공하였다. 북위 38.35˚에 위치하며, 해발고도 70m에 높이 8.8m의 2층 슬래브 건물이다. 연건평은 104평이며, 1층과 2층 각 52평씩으로 구성되어 있다.
1층은 멸공관으로, '민족의 얼', '멸공의 의지', '통일을 향한 전진' 등 3실로 세분해 6·25전쟁 당시부터 현재까지의 각종 무기와 장비, 금강산의 대형 모형·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120석의 좌석을 배치하고, 북쪽 면은 모두 유리창으로 만들어 북한의 금강산과 해금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전망대 주변에는 지름 1.25m, 높이 1.87m의 통일기원범종과 전등 1,500개가 달린 전진십자철탑, 민족웅비탑, 마리아상, 통일미륵불, 351고지 전투전적지 등이 있다.
전망대에서 금강산까지는 최단 16㎞, 최장 25㎞밖에 되지 않아 일출봉(日出峰:1,552m)·월출봉(月出峰)·채하봉(彩霞峰:1,588m)·육선봉(六仙峰)과 집선봉(集仙峰)·세존봉(世尊峰)·옥녀봉(玉女峰:1,424m)·신선대(神仙臺)·관음봉(觀音峰) 등 금강산의 대표적인 봉우리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고봉인 비로봉은 맑은 날에만 보인다. 해금강은 더욱 가까워 만물상(萬物相)·부처바위·백바위·구선봉(九仙峰) 외에 선녀와 나무꾼의 전설로 유명한 감호(鑑湖) 등 해금강 전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연중 무휴이며, 입장료는 대인 2,000원(단체 1,500원), 소인 1,000원(단체 800원)이다. 그러나 통일전망대에 가기 위해서는 10㎞ 남쪽에 있는 통일안보공원을 거쳐야 하며, 소정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 매년 150만 명에 달하는 실향민과 관광객이 찾는다. 주변 볼거리로는 대진항·화진포호(花津浦湖)·화진포해수욕장과 남한 최북단 마을 명파리, 역사안보전시관 등이 있다.
- 아는지 모르는지 애들은 전망대에 설치된 대형 유료 망안경을 보고 있다. 전망대 바로 밑으로 하여 동해안을 따라 이미 철로는 전부 공사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 남한쪽으로만 완성되면 오늘이라도 기차는 부산에서 원산까지 달 릴 수 있을 것 같고 도로공사 또한 분주하게 움직이는 대형 건설 차량으로 볼때 거의 완성단계로 비쳐졌다. 모친이 십수년전에 왔을때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였지만 철책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고 가로 질러 있다.
발앞에 펼쳐지는 금강산의 옅은 모습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외조부, 외조모의 고향인 강원도 통천 땅인데 우리 모친은 철책너머로 무슨 생각을 하고 하셨을까.
[ 사진첨부]
- 통일전망대에 대한 우리 정부기관의 대책이 절실하게 필요 될 것 같다. 이곳은 말그대로 통일을 그리는 통일전망대인데 이젠 전부 관광지화하여 이여름 땡볕에 방문개들의 편의시설은 단 한개도 찾아 볼 수 없고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인근 점포로 가라는 형국이다. 이미 노후화된 대형 브리핑장은 한켠에 거의 방치되어 있고 좁디좁은 전망대는 수십개의 망원경으로 채워져 있으며 그나마 기념사진 촬영하기 좋은 장소는 영업위치로 확보되어 있다. 정말 통일의지와 의미가 있는 당국의 정책현장 인지 아니면 그냥 대충 놀다가라는식인지 아쉬운 대목이다.
- 한쪽에서는 615니 815니 하며 남북한 상호방문이 수시로 이루어져 활기를 띠고 있는데 정작 분단의 현장은 좀체 그런 분위기는 없다. 그나마 철도가 깔려 있고 도로가 공사중에 있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밖에 없는 현장이다 . 보다 세심하고 진정 통일의지를 담은 전망대 시설을 촉구한다. 여기는 관광지 이전에 우리 한반도의 처절하고도 치유할 수 조차 없는 비극의 역사현장임을 잊어서는 안 될것이기에 관계당국의 신중한 의지를 기대해본다.
○ 14시 10분 중식( 간성)
- 식구들을 재촉, 통일전망대를 빠져나왔다. 더운 날씨와 허기가 밀려 고성을 지나 간성 국도변 옆 된장찌개 식당에서 생각보다는 맛이 괞찮은 식사를 하였다. 우리애들은 여전히 잘먹는다. 나는 신기할 뿐이다. 된장찌개도 그렇지만 순두부 맛도 차려놓는 방법도 특이하다.
나는 조금 느끼하다 생각하였는데 아들놈은 연방 맛있다고 한다. 식당 주인의 그리 친절하지 못함에 기분이 상하였지만 그런대로 누르고 식사 끝.
- 이제부터는 그냥 하행길에 이리저리 들러 볼 요량이다. 강원도 동해안 특성상 산과 해안가뿐이다. 또한 곳곳에 있는 해양호수가 많다. 조금 내려가다 보니 간성 인근 거진 화진포 해수욕장이 눈에 들어온다.
○ 15시 화진포 도착 (김일성 별장 및 이승만 별장 관람 및 화진포일주)
- 이곳 화진포에는 화진포 해수욕장이 있고 나혼자 생각인지는 몰라도 조금 우스운 곳 있다. 이름하여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 이기붕 총리 별장, 그리고 김일성 전 북한 주석 별장이 우리 정부 당국의 예산으로 기념실같이 보존, 관리되어 관광 상품화하여 유료 입장 시키고 있다. 이른바 화진포 ‘패키지’ 관광상품화 되어 있었다. 위 세곳과 화진포 호수, 화진포 해수욕장 5곳이다. 나는 도대체 이사람들의 별장이 도대체 어떤 역사의미가 있으며 어떤 정책방향에서 고루한 역사 유물을 보존하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 이사람들 전부 우리나라를 이렇게 만든 분단과 전쟁 전범 당사자들 아닌가. 아무리 정확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지만 조금씩 밝혀지고 있는 우리 근현대 역사의 진실적 측면에서 볼때 고루한 유물인데 아직도 이렇게까지 길이 길이 보존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우리 애들은 처음 관람하는것이기에 알아야 하지만 계속 이어지는 관람객중 거의 대부분이 나이있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고 더군다나 김일성 별장의 경우 실내 냉풍장치 부실로 엉망이었다.
- 김일성 별장 앞에 주차장이 있어 그곳만을 대충 관람하고 이승만과 이기붕의 별장은 그 앞을 지나치도록 화진포호수가 일주도로로 되어 있었다. 화진포 해수욕장에는 여느 동해안 해수욕장과 같이 많은 해수욕개들이 있었는데 우리 민정이를 위하여 해수욕장에 있다 가려 했으나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지 못해 그냥 지나칠 수 밖에 없어 미안하였다. 호수는 자그만한 산으로 둘러쌓여 있고 제법 운치있는 호수로 위와 같은 이들이 찾아들만한 장소임에는 틀립없을 정도로 수려하였다.
- 우스개소리인데 예전 북위 30선 이북에 위치한 이 화진포에 한국전쟁이전 김일성이 이곳에 휴양차 왔다 풍경이 수려하여 별장으로 꾸몄다고하는데 고작 하루 묵고 간 이장소를 샘이난 이승만씨가 그 맞은편에 터를 확보하여 꾸몃다고 하며, 이승만씨의 최측근인 이기붕씨가 이승만씨를 닮느라고 그 중간쯤 지어다고 하니 그 발상이 참으로 유치하기 짝이 없다.
물론 경치만큼은 수려하지만 어째 이사람들에게는 아깝다는 생각이 들며 이런 곳에서 그런 엉망같은 정책들이 나왔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완전 자연 훼손이다 싶다.
※ 화진포 [花津浦]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縣內面)과 거진읍에 걸치는 동해 연안의 석호(潟湖)로,
강원 지방기념물 제10호. 면적 2.3㎢. 호안선 길이 16km. 경승지이며, 수복(收復) 전에는 김일성의 별장, 이승만의 별장, 이기붕의 별장이 있었다. 담염호(淡鹽湖)로, 연어·숭어·도미 등 서식어가 많아 낚시터로서도 유명하며, 겨울에는 백조(천연기념물 201)가 찾아든다. 호수와 바다 사이의 백사장은 해수욕장으로 이용된다.
○ 15시 40분 송지호 도착 및 관람
- 속초방면으로 가다보니 오른쪽으로 ‘송지호’ 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서 도로변 주차장에 들어섰다. 도로변에는 호수쪽으로 거대한 전망대 신축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규모가 제법 거대하였다. 조금의 호기심을 가지고 호수 입구로 출입로가 확보되어 들어서니 도로변에서는 가려졌던 호수의 풍경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안가와는 도로로 갈라져 있지만 이호수에는 민물고기와 바다고기가 같이 생활하고 있단다. 제법 무대 설친 흔적도 있고 호수안까지 나무로된 목조 전망대까지 있으며 주위 수목지구는 조수보호구역으로 공고한 것으로 보아 겨울철새들도 드리는 곳으로 건너편 산 정상에는 송지대 라는 정자까지 있어 한창 관광 상품화 중으로 보였다.
- 난 몰랐는데 해안가 조수보호지구로 목책방지 안쪽으로 인공적으로 ‘해당화’가 많이 심겨져 있었는데 군데군데 파인 흔적을 보니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뽑아 간 것 같다. 참 대단하다. 이 더운 곳 이곳까지 와서 아직 피지 못한 꽃을 가니. 이곳은 도로변 전망대가 완성이 되고 본격적으로 개발되어 2-3년 후에는많이 변하게 될 장소가 될 것이다.
※ 송지호 [松池湖]
강원 고성군 죽왕면(竹旺面)에 있는 호수로서, |
호수둘레 6.5 km. 오호리(五湖里) ·오봉리(五峰里) ·인정리(仁亭里)에 걸쳐 있는 석호(潟湖)로,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었다. 바다와 연이어 있어 도미 ·전어 등의 바닷물고기와 잉어 등의 민물고기가 함께 서식하며, 맑은 호수와 송림이 울창하다.
호수 맞은편 죽도(竹島) 일대에는 송지호해수욕장이 4 km에 걸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약 1,500년 전에는 이 호수가 정거재(鄭巨載)라는 구두쇠 영감의 문전옥답(門前沃畓)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노승이 찾아와 시주를 청하므로 거절하자, 쇠절구[鐵臼]를 논 한가운데에 던지고 사라졌다. 그 뒤로 쇠절구에서 물이 솟아나 송지호가 되었다고 한다. 낚시꾼이 많이 찾으며, 백조(천연기념물 201)의 도래지이기도 하다. 속초~고성 국도가 호수의 동안을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 17시 외가도착, 삼겹살파티 및 음주. 그리고 애끓고 서러운 삶을 생각하며.
- 외가로 오는 도중 생각해보니 예정되로라면 오늘밤이 마지막으로 보내는 밤이었다. 그냥 보내기도 그렇고 해서 양양읍내 시장에 들러 조금의 삼겹살과 쇠고기를 구입하였다.
- 외가에 도착하니 외삼촌과 숙모께서는 이미 계셨는데 가만 보니 하루종일 그냥 지내지는 않은 것 같아 여쭈어보니 옥수수밭과 고추밭 작업을 하고 오신 모양이었다. 설악산과 통일전망대까지 다녀왔다고 하니 퍽이나 놀래시는 기척이다. 마당 한쪽 켠에서 옥수수를 다듬고 계시는 외삼촌과 함께 대충 세면을 한 모친께서 거들며 이야기하고, 집 뒤켠 우물쪽으로 가니 외숙모께서 감자를 갈아 감자전 준비를 한 것 같았다. 아마 저녁식사용이지 싶다.
- 우리 애들은 옥수수 정리하고 남은 것들을 소에게 갖다 준다. 어린 소와도 오늘밤이면 이별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의 울음소리는 더욱 우렁차고 그를 본 경덕이와 민정이는 좋다란다.
- 날씨가 무척 더웠고 따라서 귀찮았지만 온 식구들이 협심해서 마당으로 전기를 이끌어 자리를 마련하고는 삽겹살 파티를 하였다. 한쪽에서는 아내가 마늘전을 붙였는데 불빛 옆에서 제법 더웠을 것이다 . 다른 한쪽 삼겹살 구이장소는 모친과 외삼촌과 애들과 같이 자리 하였는데 더운 것도 모르고 열심히들 먹었다. 애들의 삽겹살과 쇠고기 먹성에 난 다시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집에서도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이곳에서 먹는 것을 보니 도무지 어찌된 영문인지 판단되지도 않는다. 나중 부산집에 가보면 꼭 한번 물어봐야 겠다.
-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술은 빠지지 않았는데 외삼촌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제법 많은 량으로 시간을 보낸 것 같았다. 농사일 하면서의 애환, 이런저런 집안 이야기, 그리고 행정당국에서하는 각종 농촌 정책들을 들었는데 아직까지도 우리네 농촌 계신분들은 여리고 착하고 순수함을 말씀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 그 중에서도 특히 속초 동해간 고속도로 공사 구간 논이 편입되면서 벌어졌던 대목은 전형적인 정부의 토지 강제수용방식 그대로 진행된 것 같아 마음에 상처로 깊히 박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첫날부터 술자리 화제에 이 내용은 단 한번도 빠진적이 없을 정도로 그 속내를 말씀하시는 것으로 봐서 군청과 토공에서 대충대충 도로 부지를 확보 한 것 같았으며 군청 직원들 또한 한통소이었다는 것을 볼때 같은 공무원으로서 죄송하였다.
- 술자리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나도 같이 흥분하였고 특히 도로가 나는 부분이 논 중간을 관통하니 양쪽으로 쪼개진 논은 이미 논으로서의 기능상실이어서 같이 보상청구 하였는데 몇 번을 요구한 끝에 턱하니 부족한 보상책이었다고 한다. 주위 다른 지주들은 처음에 그냥 설득되었지만 밤낮으로 찾아오는 군청 직원들에게는 당 할 수 없이 자포자기심정으로 도장 찍었다면서 말씀하시는데 무척 화가 났다.
- 이고장의 어느 분 치고 외삼촌과 다르랴. 그리고 이때까지 이 농토를 어떻게 가꾸어 왔으며 이 논으로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기쁨과 환희를 주었음을 당국자들은 알고 있었을까. 나라도 좀더 관심있었고 현명하였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으며 외삼촌 또한 그런 소망을 내 비쳤다. 내내 하는 말씀이 여유있으면 이곳 논 밭을 너네들이 매입하였으면 하는 기대였다. 한없이 부족한 나자신이다. 대답은 적극적이었지만 현실은 그게 아닌게 술만 계속 들어 갈뿐이다. 산골이니 이정도지 시내 중심이었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 두 번째 사실은 모친위로 언니가 한분 있었음을 이미 기록하였는데 그와 관련 사항이다.
- 만주에서 해방되자마자 가솔(家率)하여 이곳으로 정착하였던 외조부께서는 그때 당시 이주하면서 2살 정도 였던 외삼촌을 모친 언니 - 그러니까 나에게는 큰이모다 - 께서 업고 춘천 이모는 할머니가 업고 해서 이곳까지 왔다고 하는 것을 보면 아마도 큰 이모는 제법 연세차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큰이모와 모친사이에 다른 두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그때 그시절의 환경에 의해서 어릴때 사망하였다고 하니 한 많은 만주시절이었고 돌아가신 외조모께서도 외조부로 인하여 표현하지는 못하였지만 엄청 서운하였다고 한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도 그들에 대해서 특히, 큰이모에 대한 감정이 남 달 랐다고 하니 큰딸이라고 많은 고생을 시켰던데 대한 회한이 아니었을까.
- 이주하자마자 이곳은 38선 이북으로 갈라졌고 순식간에 이고장은 인민위원회 설치등 빠르게 공산당화 되었으며 제법 집안의 살림 기둥 역할을 하였던 큰이모는 공산당 지역 여맹위원장(지역인민여성위원회)을 본의 아니게 맡았다고 한다. 그대 그시절이 전부 그러 하였지만 여맹이니 혁명이니 인민이니 하는 이념적인 용어에 과연 이 산골의 주민들이 얼마나 이해하고 맡았는지는 역사를 통해서 이미 밝혀졌지만 그냥 눈에 띄는 대로 맡았던 이 직책이 고대로 족쇄가 되어 실종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 외삼촌과 모친의 대화를 참고 하여 종합해보니 보통 평범 소설속에 나오는 그때 그시절의 38선 인근 생활상이었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38선 개념은 허무어지고 동시에 끝없이 밀리던 남한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여 압록강까지 밀고 갔던 국군이 중공군에게 밀려 1?4후퇴가 되면서 지금의 휴전선을 두고 한창 밀고 땡기던 도중 이곳도 예외없이 국군과 인민군들이 전투성과에 의해 들락날락한 그런 곳이었다.
- 그러니 자연 인민군이들어오면 38선 이북으로 자기들 땅의 주민들이니 자연스러울 수 밖에 없었으나 국군들이 들어오면 영 딴 판일 수 밖에 없는 것이었다. 게중에 보면 이데올로기에 중심 잡지못하고 이리저리 휘둘린 주민들도 있었을 것이고 시키면 시키는 되로 지시이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 특히 남자도 아닌 여자의 신분이야 더욱 노출정도가 심한 것이었을 것이고 더군다나 외조부의 사촌들이 전염병에 걸려 돌 볼 사람이 없어 큰이모가 두사람의 병수발을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계속 하고 있었는데 진주한 국군들이 이것을 알고는 친북행위자로 몰아 수배하였고 쫓기는 과정에서 일부는 사살되고 큰이모에 대해서는 후일 양양읍쪽에서 목격하였다고는 하지만 그 이후로 쫓겨간 인민군들을 따라 월북하였는지( 이말도 웃긴다. 38선으로 인하여 이미 월북자가 아닌가) 아니면 그때 쫓길때 사살되어 이느 곳에 그냥 매장되었는지 확인은 할 수 없었다고 한다.
- 그런데 이러한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사례고 가능하다면 끝까지 확인하여야 하는 것인데 전쟁이후로 남한에서는 지속적인 반공정책으로 연좌제인지 뭔지하는 이상한 법제로 아예 생각지도 못하게 하는등 당국에서 물으면 무조건 죽었다거나 그런일 없다고 발뺌하기 바빴을 터이다.
- 산사람은 죽은 사람을 위하여 모쪼록 자기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여야하는 것이 우리네 일반상식적 사항이며 오히려 죽은 사람을 위해서 산사람들의 권리와 자격과 인격이 말살되는 참혹한 현실과 또한 실속없는 일부 극렬주의자들의 권력다툼과 허울뿐인 이데올로기 희생양으로만 만족되어지는 삶을 요구받았는데 아직까지도 그에 대한 실체가 규명되지도 규명 할 수도 없는 것은 그 어떠한 변명이라도 궁색하기 짝이 없는 정부당국자들에의 무책임한 태도를 성토할 뿐이다.
-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남북한 이산가족 찾기 차원에서도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는게 지금 현실인데 왜 이들은 아예 시도조차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였을까. 참으로 기막힌 현실이다. 분단된 우리 민족의 현실이 가깝게는 나의 인척중에도 있음에 당황스럽기까지 하며 평소 생각하였던 나의 예상과 조금도 비켜나지 않은사실에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 왜냐하면 예전 돌아가신 부친께서도 조금은 알았는지 어릴적부터 취중에 잠깐 잠깐식 외가에 대해서 들은 기억에 따른 나의 상상력이 많이 동원 된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 고생만 시키고 인생을 채 피우지도 못하고 사라져간 자식의 실종에 확인조차도 못하고 애를 태운 부모들의 애태움과 서러움에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보상 할 것인가. 지금 생각하니 돌아가신 외조모께서는 외조부를 피하여 곰방대를 사용하거나 신문지에 말아 피우셨던 그 담배연기의 의미를 조금이라도 알 것 같다. 왜냐하면 담배만 피우시면 그 어떤 말도, 표현도 없이 재가 될 때까지 피우셨던 것이다.
- 반드시 확인하고 싶었다. 생사확인은 되어야 할 것 아닌가.
(※ 이후 부산에 도착한 후 발급받은 모친의 제적등본에는 큰 이모의 흔적조차 없었다. 1963년 주민등록제도가 정착되면서 우리나라 호적법도 크게 제개정되었고 이일대의 주민들에게는 개인이 원했던 아니면 정략으로 했던지 생존 한 사람만을 근거로 호적정리가 되어 있었다. 물론 다시 알아봐야 할 것이다. 주민등록이전에 민적부 라는 것도 있었을 것이다.)
- 한개의 백열등에 밤을 밝히며 외양간에 홀로 서있는 소가 무엇이 궁금한지 귀따귀에 메달리며 달려드는 모기와 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우리 역시 밤을 새워도 새워도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저녁식사 자리가 음주좌석으로 변하여 모친의 성화에 억지로 끝났지만 이러한 삶들의 무게속에 눌리어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 피곤에다 술까지 뒤범벅되었지만 외가 마당에서 가진 이 삽겹살 자리는 영원히 잊혀지질 않을 것이다. 거의 11시가 되어서야 자리를 파하고, 난 뒤켠으로 가서 차디찬 물을 계속 부어댔다. 몸은 차가웠지만 마음은 좀체 차가워지지 않는 밤이다. 나름대로 서러운 인생들이다. 열씸히 살아왔던 이네들의 삶과 죽음에 감사의 경의를 표하며 실종되거나 사망한 이들에게 대신 무한한 애도의 기도를 드린다.
- 하늘에 별이 오랜만에 은밀히 반짝인다. 이젠 이곳에 와서까지도 달보기,별보기가 귀하다.
오늘 이곳에서의 마지막밤도 어제처럼 무척 긴 밤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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