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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가지

10년만에 찾아본 어릴적 고향 선동 신현부락

by 푸른솔가지 2006. 3. 6.

10년만에 찾아본 어릴적 고향 선동 신현부락



지난 일요일 근교산은 가지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끝에 그곳을 함 가고 싶어 찾았다.


유아시절은 강원도등 지방에서 보냈으나 유년시절(6살부터)은 부산 조부댁에서 우리 식구들은 살았었는데 그곳이 바로 선동 회동수원지 “신현부락”이란 곳이다. 정확한 행정구역명은 “부산광역시 금정구 선두구동 신현마을”이다.


이곳은 대대로 우리 죽산(竹山) 박(朴) 씨 집성촌인데 나의 4-5윗대부터 니까 대충 조선시대 이후부터 정착하여 온 곳이다. 직업군생활을 정리한 부친이 온천장에 퇴직금으로 마련한 3군대 집을 임대해주고 이곳에서 거의 4년간을 그냥 살았으니 그야말로 형편없이 살았다.


그래서 나의 유년시절은 거의 촌구석에서 생활하는 농사꾼보다 못한 생활이었고 하루하루의 끼니가 걱정되는 나날들이었다. 그나마 조부집과 나란히 있었던 작은조부집이 농사를 지어 생계는 도움이 되었었다.


그곳에서 난 울 가족들과 초등2년까지 다니다 지금 살고 있는 부곡동 맞은 편 온천장에 내려와서 살았고 그이후도 쭈욱 조부 생전시까지는 제법 많이 방문하였고 조상들의 묘지가 있어 신혼때까지만 해도 춘제, 기제, 명절시에는 꼬박꼬박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근데 지금은 어느 무지막지한 사람의 판단착오로 ( 자기 사정도 있었겠지만) 논이랑, 밭이랑, 산이랑 전부 팔고는 조상묘만 남아있는 아무런 연고 없는 남의 마을이 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최근 이곳 주위도 개발바람이 불어 엄청나게 변하였지만 수원보호지구로 묶여있어 아직도 예전모습이 투영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이곳을 방문하리라고 맘먹고 혹 아는 사람이 있을까 싶어 그곳을 조금지나쳐 상현 부락입구에 주차를 하고는 산으로 들어갔다.

이산은 뒤로는( 마을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와 부산양산국지방도를 끼고 있고 앞으로는 일제시대부터 조성된 인근 상수도원인 회동수원지가 있다. 물론 수원지가 조성되기전에는 집들이 조성된 수원지에 있었으니 마을이 이주한 것이다.


이산에는 집안의 이름모르는 수십기의 조상묘가 산재하여 있으며 또한 조부모 묘가 있어 몇 년전부터 한번 가보리라고 마음먹었지만 가보지를 못하여 오늘 찾게되었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예전 어릴적엔 이곳을 통하여 지금 범어사쪽에 있는 청룡 초등학교를 2시간정도 산길을 걸어 등하교 했었는데 지금은 고속도로 및 지방도로 개설과 아울러 골프장건설, 숲이 우거져서 걸어가지는 못하지만 지난 겨울이 지나면서 낙엽들이 떨어져 기존 산 숲속길 흔적이 없어져 우선산길을 찾기에 애를 먹었다.


이곳 역시 계절이 계절인지라 인근 주민들은 보이지 않고 그냥 나혼자의 산행길이고 숲속세계며 이름 모를 산새들만 찍찍거릴뿐이다. 좀 깊숙한 곳을 들어가니 가시나무들이 온몸을 찌르기도 하여 손이며 종아리며 생채기가 난다. 한참을 헤매고 들어가니 몇몇 봉분들이 보이고 예상되로 묘비명에는 한자로 “ 竹山 朴 0000” 라고 적혀있는 봉분들이 이곳자저곳 보이더니 이윽고 눈에 띤 집단 봉분들이 있는 곳까지 왔다.


눈에 많이 익은 곳이다, 예전 온천장에 살 때 이른 봄이면 “ 신사”라 해서 조상 들에게 한해의 시작을 알리는 제사를 문중차원에서 지냈는데 온갖 음식을 차려 와서는 펼쳐 놓고 조상을 기린 문중 묘소다.


이미 흘러간 세월이 갔는지 아니면 집안의 생성소멸을 뜻하는 듯한 묘자리 관리상태를 보니 안타까움과 예전에 어른들이 귀하게 하신 말씀들이 애잔하게 느껴진다.


누구묘인지는 몰라도 예전처럼 절을 올리고 한참을 돌려보니 예전 기억들이 물밀 듯이 떠오른다. 어릴적 제사보다는 떡한쪽 더 먹고 싶어 이눈치 저눈치에 한참을 먹고는 몇인분의 제사음식을 챙겨 동생들 줄거라고 온천장을 힘들게 걸어 내려온 모습. 일년 내내 배고프지 않아도 되는 그날을 생각하기만 하면 기다려졌던 배부른 날!

지금은 그런 풍경은 기억하기도 싫지만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나보다. 그때 제복을 입고 제법 제를 주도 하였던 많은 이들은 가고 없다. 우리 부친도 그중 한사람일 것이다. 지금 그 분들의 나이가 되어 오늘 홀로 이 자리에 섰다. 그동안의 집안에 대한 나의 무관심과 집안 사람들의 부친에 대한 설움에 오히려 가슴 깊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 할 수 없다.


과연 누구가 잘 못 한 것인가?


저밑에서 소를 몰고 풀도 띁기며 중간중간 이 묘자리 인근 잔디밭에 누워 파란 숲속하늘을 마주보며 흥얼거리며 친구들과 장래의 꿈도 꾸었으며솔가지와 솔잎을 지게에 키보다 높이 메고서 나지막히 걸어가는 나의 모습이 저편 숲속으로 아련히 사라지는 것 만 같다.


10년전에 찾아왔던 조부모의 묘를 찾기위해 산아래 수원지까지에서 옆산 뒷산을 전부 헤매 다녔지만 정확한 곳을 찾지를 못하였다. 이게 무신 망신이고!


몇 곳을 찾았는데 묘비가 틀리고 이미 치장한 묘가 전부 생소하였지만 대부분 익히 들어본 망자들의 성명이기에 일일이 참배하였다.

결국 한 곳을 선택하였는데 틀림없다고 생각되는게 묘지를 중심으로 산아래쪽 수원지로 트인곳에 자그만한 바위가 예전 기억을 되살린다. 그때 이곳을 기억하려고 무엇을 묻었는데 그것마저 기억나지 않지만 서너번 근처를 휘젓고 다녀봐도 다른 곳은 없는 것을 보니 틀림없었다.


모처럼 찾아뵌 나의 잘못이 너무 죄스러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산밑으로 수원지를 둘러나 있는 길을 걸으며 옛날을 기억한다. 수원보호지역이다 보니 찾아오는 사람은 없다. 모든게 예전 고대로다. 겨울철이라 호수 수위가 밑으로 쳐져있었고 관리는 예전보다 못한 것 같다.


유년시절에는 이곳에 많은 학생들이 봄가을로 소풍을 왔었고 제법 양복 입은 사람들도 많이도 찾은 곳인데 갈수록 나빠지는 인심에 출입제한 구역이 되었지만 관리는 예전보다 못한 것 같아 호수도 사람들의 관심과 정을 받아야 제대로 관리가되는 모양이다.


소풍철만 기다렸던 우리들이다.


그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들의 나누어주는 온갖 과자 부스럼들이 얼마나 맛있었든지 아마 그맛을 다른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한편으로는 참 배고픈 시절이었다. 그장소 그 소나무들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수원지를 뒤로 마을로 올라오니 거의 아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예전의 나자신이 살았던 집은 다른 이에게 넘어가 형체도 없이 텃밭이 되어 있었고 그나마 작은 조부댁은 그래도 집다운 집형체를 지니고 있다..


여기저기 친구들의 집은 예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고 일부 다른 집은 관리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였는지 거의 별장 수준이다. 차이가 많이 나는 대목이다.


마을 한복판에 있는 밭구덕에서 대보름이면 쥐불놀이, 술래잡기등으로 온종일 재잘거리는 어린시절의 소란이 어디선가 뿜어져 나올 것 만 같은 착각도한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정체모를 종교단체가 인근에 집단 수용시설을 무허가로 위치하고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짓인지 모르겠다.


이런 집단들이 올 수 있는 그런 지역이 아닌데 몹시 아쉬운 장면이다.

언제가 돈 많이 벌어 조부집을 찾고 말겠다는 결심을 꿋꿋하게 가졌더랬는데 언제 이룰 것인지 모르겠다. 너무 안이한 삶을 산 내자신이 부끄럽다. 더 열씨미 살아겠다.


그나마 남아있는 단 한곳의 추억어린 장소가 자꾸만 변해가는 모습에 안타깝기 그지없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딸아! 제발 열씨미 살아다오. 매일매일 꿈만 꾸다 가는 나처럼 되지는 말기 바라며 슬슬히 동네 어귀를 빠져 나왔다.


조상님들! 너무 죄송합니다. 부끄럽습니다. 그렇지만 조상을 팔 정도로 전 그리 살지는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정도를 걷고 있는 모습을 지니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상님! 고맙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히 계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