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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솔가지

2005년 가족 여름휴가 기행기1

by 푸른솔가지 2006. 2. 24.

1일차(8월7일)


- 05시 부산(부곡동)출발

- 06시30분 경남 현풍휴게소(구마고속도로)

- 08시30분 충북 단양휴게소(조식 - 중앙고속도로)

- 09시10분 원주 I/C

- 10시50분 대관령휴게소( 영동고속도로)

- 11시30분 강릉 오죽헌 방문

- 13시20분 주문진 방파제 (중식)

- 14시20분 휴휴암 방문(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 15시 낙산사 방문( 의상대, 홍련암, 여래상)

- 17시 외가도착(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

- 17시 20분 하조대 해수욕장 ( 외삼촌, 외사촌, 조카등)

- 19시 하조대 회센타 석식( 외숙모 생신등 )

- 21시 외가도착(덕환, 장환과 음주 및 대화)

- 23시 취침( 외삼촌 및 외사촌 과 음주 및 대화)

2일차 (8월8일)

- 06시 기상

- 07시30분 성묘( 외조부,외조모)

- 08시 작은 외가방문

- 11시2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 12시 주차장 만원으로 대기중 회차(

- 13시 양양 인근 중식

- 14시 30분 오색약수 방문

- 15시 30분 오색 출발

- 16시 10분 외가도착

3일차 (8월9일)

- 06시 기상

- 08시10분 설악산 국립공원 도착

- 08시30분 권금성 케이블카 탑승

- 09시 권금성 등반(8부능선)

- 09시30분 인근 약수암 방문( 권금성 휴게소 밑)

- 10시 신흥사방문

- 11시 신흥사 출발

- 12시 05분 통일전망대 신고소 도착

- 12시 50분 통일전망대도착

- 13시50분 통일전망대출발

- 14시 10분 중식( 간성)

- 15시 화진포 도착( 김일성 별장 및 이승만 별장 관람 및 화진포일주)

- 15시 40분 송지호 도착 및 관람

- 16시 20분 양양읍내 시장도착

- 17시 외가도착, 삼겹살파티 및 음주, 11시 30분 취침

4일차 (8월10일)

- 07시 기상

- 08시 외가출발( 감자, 옥수수,등)

- 08시 40분 한계령 휴게소 도착( 기념사진 촬영 및 휴식)

- 09시 20분 설악산 선녀탕 휴게소 도착( 선녀탕 물놀이 및 휴식)

: 곰같은 강아지 만남 * 엄청 기쁨을 맛봄

- 10시10분 백담사 도착( 인제군, 만해기념관 및 인근 계곡 관람)

- 13시 30분 경 홍천군 어론리 경유( 본인 출생지 및 부모 첫 살림장소 경유)

- 14시 중앙고속도로 홍천 기점 진입( 홍천 휴게소 중식: 제법 피곤함)

- 14시 30분 홍천 출발

- 15시 30분 단양휴게소도착 * 홍촌, 횡성,원주, 단양구간 기습폭우 운전애로

- 16시 출발 ( 동생 운전)
- 18시 언양휴게소도착

- 19시 45분 부산집도착1일차(8월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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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차(8월7일)


- 05시 부산(부곡동)출발

- 06시30분 경남 현풍휴게소(구마고속도로)

- 08시30분 충북 단양휴게소(조식 - 중앙고속도로)

- 09시10분 원주 I/C

- 11시 대관령휴게소( 영동고속도로)

- 11시40분 강릉 오죽헌 방문

- 13시20분 주문진 방파제 (중식)

- 14시20분 휴휴암 방문(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 15시 낙산사 방문( 의상대, 홍련암, 여래상)

- 17시 외가도착(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

- 17시20분 하조대 해수욕장 ( 외삼촌, 외사촌, 조카등)

- 19시 하조대 회센타 석식( 외숙모 생신등 )

- 21시 외가도착(덕환, 장환과 음주 및 대화)

- 23시 취침( 외삼촌 및 외사촌 과 음주 및 대화)




□ 15년 만에 찾는 외가에 대한 기대감에 설레이며


○8월 7일 오전 5시 부산(부곡동)출발


- 외가를 갔다온게 정확하게 1990년 8월 마지막주, 그때당시 동사무소근무시절이며 여름휴가 끝물시점에 지금은 아내지만 집사람과 교제할 때 였다. 물론 우리집 어느 누구에도 말하지 않고 강원도( 설악산, 낙산사, 하조대, 오색온천, 외가) 와 한계령을 넘어 서울을 거쳐 부산으로 귀향 하였었다.


- 그때 기억에 외할머니가 생존 하였을때고 어릴때부터의 나의 정신적 안식처이자 육체적 도피처로 애용(?) 하였던 외가를 굳이 목적지로 정한 것은 나도 이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만큼 의젓한 모습을 외가 식구들에게 보여주기위한 만용에서 비롯되었지 않나 싶다.( 지금 생각하면 여전히 어른스럽지못한 유아적인 발상인 것 같다.ㅋㅋㅋ)


- 또한 15년동안 무엇을 한다고 한번도 가지 못하고 이제야 가는지에 대한 죄스럼움과 돌아가신 외조모에게도 그 어떠한 변명도 드릴수 없을 정도의 나자신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지만 이모든 감상적인 반성으로 면책 받을 수 가 있을련지 ..


- 오늘 2005년 8월7일(일요일)!

정확하지는 않지만 거의 15년만에 외가를 찾는 셀렘은 나뿐만 아니라 같이 동행키로한 우리집 모든 식구들까지 동참한 모양이다.


- 분명 이른 아침 6시에 출발한다고 하였는데 4시 조금지나서 우릴 깨운 엄마와 여동생, 나의 매끄럽지 못한 동시에 선잠 깬 상태에서 투정어린 말투에 아내, 아들, 딸들이 그냥 기상하였으니 기분이 상대적으로 묘했다.


- 이리저리 아내가 준비한 물건들을 가지고 여동생이 대기시킨 승용차를 출발하는데 여전히 어둠이 채가시지 않은 새벽 아침이다. 오늘이 일요일만큼 상행선은 상대적으로 번잡스럽지 않을 것이란 계산으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 대구, 춘천간의 중앙고속도로를 이용키로하고 마산으로 차의 방향을 잡았다.


- 마산을 지나 구마고속도로에 진입하자마자 1m 앞길도 보이질 않을정도의 짙은 안개, 내릴 듯 말듯한 빗방울에 만만치 않은 운행조건에 제법 힘이 들었지만 한낮에 덤벼들 태양을 생각하고 가능한 한 쉬지 않고 계속 속도를 낸 끝에 대구를 앞둔 현풍휴게소에 도착, 10분여의 휴식을 가졌다. 아침일찍 집을 나와서 그런지 도로상에 차들은 거의 없었으며 창녕을 지나서 부터는 날씨가 그런대로 선선하고 운전하기에 좋았다.


- 집식구들은 이른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여행의 기분을 그런대로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 작년에 전식구들이 인천있는 동생네에 여름휴가(3박4일)를 가서는 영종도와 용인에 있는 삼성 ‘ 에버랜드’를 방문했는데 전식구들이 같이 움직이기는 이번이 두 번째 인 것 같고 작년에도 더위 땜에 무척 고생 한 적 있어 이번에는 가능한한 더위에는 고생하지 않을 요량인데 민정이가 유달리 물놀이를 좋아해서 어쩔 다른 방도는 없는 것 같다.( 한해가 지나도록 집식구들, 애들을 위해서 한일이 단 한번도 없는 것 같기에 원하면 들어 줄 수 밖에 없는 나의 무력함이다)


- 대구진입해서는 강릉과 연결되는 영동선을 만나기위해서 원주까지 가야했고 아마 정오를 넘어 영동선을 가게되면 수도권 거주하는 사람들의 동해안 피서객들 땜시 도로사정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전에 진입해야만 하는 조바심도 느꼈지만 제작년에 방문한적 있는 단양의 기억에 휴게소에 잠시 쉬었다.


- 그러니까 2003년, 2002년에는 나름대로 중앙고속도로 인근을 자주 찾은 것 같다. 안동 하회마을에서의 1박, 단양 구인사 및 8경, 영주 직지사, 청송 주왕산, 문경 방송국 세트장( 그날 촬영이 없어 입장은 하지 못하고)등 애들과 같이 갔었던 기억들이 있었고 상큼한 추억들도 많이 만들었던 것 같다. 그때는 큰놈은 매일 야단 친 것 같았고 막내는 무엇이 바쁜지 정신없이 뛰어 다닌 것 같았다. 매일 직장에 나가는 울 부부를 대신하여 애들 키운다고 고생하는 모친과 같이 다닌 것 또한 생각 난다.


- 오전 9시 전후해서 드디어 충북을 지나 강원도 원주에 진입하였다. 이제 두시간정도면 양양에는 도착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외가 도착도 시간 조율이 필요한 관계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해두어야 하였고 그럴려면 전체 일정을 머릿속에 그려 두어야 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여행을 하면서 출발이전에 확실하게 일정표를 짜는 치밀함은 없고 대충 전체일정속에서 현지 사정을 고려한 짜임새를 추구하는 편이다).


- 영동고속도로는 예전 군사정부에서 주위의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생존여건들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인 고속도로를 개설하였기에 곳곳에 허점이 많은 것으로 난 알고 있었다. 그 예상 그대로 도로사정은 만만치 않았고 도로폭도 운행량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좁았다. 명색이 수도권과 동해안을 연결하는 핵심 도로인데 간단하게 생각한 것 같았다. 대관령 인접에서는 최근에 설치 한 것으로 보이는 야생동물 및 조수보호를 위한 연결 통로가 곳곳에 터널 겸용으로 개설되어 있어 환경보존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음을 느꼈다. 또한 대관령 정상에 다가오면서 강원도 특유의 고랭지 밭이 끊임없이 펼쳐져 있었고 산림또한 무성한 것으로 봐 보존이 제대로 되어 있는 것 같았으나 곳곳에 눈살 찌푸리는 펜션들과 그를 홍보하는 플랭카드들이 펼쳐져 있는것에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 대관령 휴게소를 난생 처음 방문 하여 이곳 저곳을 훑어 봤으며 이곳까지 오는 내내 강원도 특성에 대해서 큰 놈에게 이곳 저곳 강조도 하고 설명도 했는데 건성으로 받아 들이는지 아니면 진정으로 받아 들이는지 믿음성이 가지 않는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 예전에 나도 저랬을까하는 반문도 해보지만 안 그러질 않은것 같고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였을 시정, 아버지는 유달리 우리 다섯식구들을 데리고 강원도 외가 가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마도 선친도 외가가 만만하였고 그리 부담없었기에 자주 찾았지 않나 싶다.


- 그때는 기차를 이용하여 갈 수 밖에 없었고 시간 또한 12시간이 넘어 걸릴 정도 였으나 아무 불평불만 없이 선친을 따라 다닌 것 같은 생각들이 운전 내내 주마등처럼 펼쳐 졌는데 나자신도 이젠 머리끝이 희뿌옇게 되고 자식2명 동반해서 나들이하니 감상적으로 예전의 나날들을 반추하는 계기가 되는 것 같기도하다, 단지 선친이 계시지 않는것만 빼고.


○ 11시30분 강릉 오죽헌 방문


- 강릉시내를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애들을 위해서 오죽헌을 갔다. 이곳을 두 번째로 방문하지만 애들은 처음이고 이곳은 율곡 이이를 출산하고 그를 조선 중기 대학자로 훌륭하게 교육시켜낸 그의 모친 ‘신사임당’ 이 생활 한 곳으로 알려져 있어 우리나라 자식교육의 근본이면서 청소년들의 효 교육의 전당으로 알려져 있어 년중내내 관람객들이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 . 이곳은 예전, 정확하지은 않지만 외조부 초상때 외가를 모친과 함께 와서 제사를 지내고 난 후 강릉역에서 기차시간를 기다리기가 무엇하여 택시를 타고 잠시 방문 한 기억이 났다. 그때 모친은 강원도에 살면서 어릴때 강원도 이런곳이 있었는지 그리고 단한번도 오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무려 이십년만에 우리 전식구들이 함께 방문하게 되었다.


( 사진 첨부 )


※ 강릉 오죽헌 [江陵烏竹軒]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竹軒洞)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 양식이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난 집으로 조선 중종 때 건축되었다. 한국 주택건축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에 속한다. 4면을 굵은 댓돌로 한 층 높이고 그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배치하여 네모기둥을 세웠다.


건물을 향하여 왼쪽 2칸은 대청이며 오른쪽 1칸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대청 앞면에는 각각 띠살문의 분합(分閤)을, 옆면과 뒷면에는 2짝 씩의 판문(板門)을 달고, 그 아래 벽면에 머름을 댔다. 온돌방은 뒤쪽 반 칸을 줄여 툇마루를 만들고, 앞벽과 뒷벽에 두짝열개의 띠살문을 단 것 이외는 모두 외짝문이다. 천장은 온돌방이 종이천장이고 대청은 연등천장으로 꾸몄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에 걸쳤으나, 온돌방과의 경계에 있는 대량(大樑)은 그 아래 중앙에 세운 기둥으로 받쳤다.


대량에서 좌우 측면의 가운데 기둥에 걸쳐서는 충량(衝樑)을 배치하였으며, 그 상부에는 지붕 합각(合閣) 밑을 가리기 위하여 우물천장을 만들었다. 대량 위로 종량(宗樑)과의 사이에는 대공을 받쳤는데 그 형식은 오래된 수법을 따르고 있으며, 조선 초기의 주심포(柱心包)집에서 볼 수 있는 대공의 계통을 이은 것이다.


기둥머리에 배치된 공포(?包)는 주택건축에서 보기 드문 이익공형식(二翼工形式)이며 그 세부 수법으로 보아 가장 오래된 익공집 건축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쇠서의 곡선에는 굴곡이 남아 있고, 첨차(?遮)의 형태는 말기적인 주심포집과 공통되는 특징을 지녀 주심포집에서 익공집으로의 변천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조이다.





- 강원도 영서지방과는 달리 대관령을 넘어온 영동지방은 찌는 듯한 폭염이었고 오죽원의 자경문을 나올때까지 전식구들이 땀을 뻘뻘 흘렸다. 오늘 처음으로 흘리는 땀이리라. 우리 민정이는 꼭 삶아 놓은 고구마 같이 쪄 있는게 측은하기 까지 하다. 그래도 어쩌리. 아내는 연신 애들에게 포즈를 요구하고 카메라로 추억을 간직하기위해 애쓰고 있지만 카메라 미처 제대로 준비가 완벽하지 못한 것 같다.


- 오죽헌이니 검은 대나무앞에서 딸내미와 함께 한 컷!


(사진첨부)




- 매번 부산 인근 사찰을 방문하지만 사찰경내 및 입구에 심어져서는 그자태를 빨갛게 드러내는 매혹스럽게 활짝 핀 빨간 꽃의 나무이름을 몰랐는데 이곳에는 거의 이나무로 덮혀져 있다. 이번에 이름을 확실하게 알았다. 이름하여 “베롱나무”, 소위 부처의 꽃이란다. 학명도 불교식으로 명명되어져 있다( 정확한 학명은 “ ” 이다)



※ 베롱나무



꽃이 오랫동안 피어 있어서 백일홍나무라고 하며, 나무껍질을 손으로 긁으면 잎이 움직인다고 하여 간즈름나무라고도 한다. 높이 약 5m이다. 나무껍질은 연한 붉은 갈색이며 얇은 조각으로 떨어지면서 흰 무늬가 생긴다. 작은가지는 네모지고 털이 없다. 새가지는 4개의 능선이 있고 잎이 마주난다. 잎은 타원형이거나 달걀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며 길이 2.5∼7cm, 나비 2∼3cm이다. 겉면에 윤이 나고 뒷면에는 잎맥에 털이 나며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꽃은 양성화로서 7∼9월에 붉은색으로 피고 가지 끝에 원추꽃차례로 달린다. 꽃차례는 길이 10∼20cm, 지름 3∼4cm이다. 꽃잎은 꽃받침과 더불어 6개로 갈라지고 주름이 많다. 수술은 30∼40개로서 가장자리의 6개가 길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삭과(殼果)로서 타원형이며 10월에 익는다. 보통 6실이지만 7∼8실인 것도 있다.


흰색 꽃이 피는 것을 흰배롱나무(for. alba)라고 하는데, 인천광역시에서 자란다. 중국 원산이며 관상용으로 재배한다. 꽃은 지혈·소종의 효능이 있어, 한방에서 월경과다·장염·설사 등에 약으로 쓴다.







- 아들내미와 함께 배롱나무와 자경문을 배경으로 한 컷!


- 관광지에 입장할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무슨 입장료가 그리도 비싼지 우리나라 관광지 입장요금은 제대로된 기준도 없는 것같고 전국 어딜 가나 통일되지 아니하고 지방자치단체마다 다른게 아주 짜증난게 나자신민 느끼는 게 아닐 것이다.


- 이를테면 강릉 오죽헌 같은 경우 청소년이하 입장객에게는 교육입장에서 무료로 추진하는 게 맞을 것 같고 그래야만 전국에서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나름대로 기회제공 차원이지 않을지. 만고에 나혼자 생각일까



○ 13시20분 주문진 방파제 (중식)


- 엄청 더운 날씨에 대충대충 관람하고 푹 삶킨 차를 가지고 준문진을 향하였다. 강릉의 경우 예전 초등학교 시절 이모댁이 거주한 관계로 한번 방문한 적 있지만 기억은 제대로 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육의 도시, 유학의 도시인 강릉은 향교와 서원들이 유달이 많고 조선시대 여성들의 선지자들을 많이 배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허난설헌의 출생지도 이곳에 있고 강릉을 대표하는 해수욕장인 경포대도 있다. 직접가지는 않아도 거쳐가면서 설명도 애들에게는 덧 붙였다. 매번 가지는 생각이지만 어느만큼 접수가되는 의문이지만 아뭏던 나는 쉴새없이 떠들었다. 10분의1이라도 접수됬으면 한다.


- 주문진을 가는 도로는‘ 7번국도’로서 아주 오래된 도로인데 부산을 시점으로 통일전망대가 있는 거진, 고성까지 연결된 한때는 유일의 남부지방 연결 도로 였었다. 예전에 외가방문을위해서는 부전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주에서 기관차를 교체하여 태백줄기를 넘어 강릉을 12시간정도 무궁화로 오는 방법이 있었고 또 한가지는 명륜동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이 7번 국도를 타고 강릉까지 7시간정도 소요되는 교통수단이 있었는데 요즈음은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양양에 국제비행기장까지 개장하였으니 세월의 유수함에 저절로 한탄스럽기까지 하다. 난 이제까지 무엇하고 살았는지.


- 강릉을 출발하여 20분 남짓 주문진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할 요량으로 주문진항구, 시장까지 들어갔지만 주차공간이 만만치 않아 양양쪽으로 약간 벗어난 등대방파제쪽에 있는 노천 포장마차 횟집에서 매운탕과 조개구이를 주문하였다. 날씨는 계속해서 푹푹 쪘지만 안주거리를 보니 술한잔 생각났지만 꾹 참았다. 오기전에 TV를 봤는데 여름 한밤에 주문진에서 오징어등을 비롯한 횟거리를 안주삼아 한잔씩 들이키는 그 장면들을 연상하고 왔는데 나의 생각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모친과 여동생등의 표현하지 못하는 불편과 짜증만 내게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민정이만큼은 등대로 연결되는 바닷가 바위틈에서 자생하는 게잡이에 신났기에 장소를 찾아들어온 나에게 위안이 된다.


(사진첨부)



○ 14시20분 휴휴암 방문(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 이리저리 땀을 흘리며 점심을 끝내기 무섭게 게속해서 양양쪽으로 차를 몰았다. 아침 5시부터 운전했으니 거의 8시간 내내 핸들을 잡고 있는셈이다 . 그렇지만 아직까지는 피곤하지 않다. 오늘 하루종일 핸들 잡아도 될 것같은 이기분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불교 TV를 자주 시청하는 모친은 오로지 ‘휴휴암’에 가기를 원한다. 최근 사찰이 새로이 생겨났는데 바닷가쪽 암벽이 부처가되어 중생들의 기도도량으로 상한가를 치고 있다는 꽤 유명한 절로서 나자신도 한번 갔으면 했는데 양양 조금 못가서 바닷가쪽에 있었다. 아마도 사찰이 들어서기전에는 군부대 작전지구로 민간인이 출입하기에는 어려웠을텐데 어떤 사유로 이렇게 개방된는지 신기하다. (동해안쪽 대부분의 해안가는 군부대 순찰대상지역이다. 그래서 일몰이후 일출이전에는 민간인 출입금지구역임)


(사진첨부)


- 바다 쪽에서 해안가로 시선을 돌리니 부처님과 같은 불상이 좌로 비슴듬이 좌정하고 있는 것이 영판 불상이긴 하다. 전국에서 많은 불자들이 매일 참배하면서 일약 유명 관광지로 된 것 같다. 그에 맞추어 대웅전 등 사찰 크기도 제법 중급이상이다. 많은 불자들이 불사에 참여한것같았다.


- 양양군 현남면 38선 휴게소를 지나 현북면 하광정리 하조대( 외가 동내입구)를 지나 낙산사로 직행하였다.


- 주문진에서 양양군 사이에는 북위 38도선이 위치하고 있다. 우리나라 해방이후 이승만이가남한 단독정부 수립하면서 미국 소련등의 주변 강대국에 의해서 우리나라 한반도가 두개의 나라로 강제 분할되면서 기준으로 삼았던 선으로 정확하게 울나라를 관통하는 동해안 쪽 경계지점으로 이곳 양양 주민들의 한이 깊게 서리고 가족친지간, 친구동무간 엄청난 애환을 가져오게한 원한의 38선이 이곳에 있다. 물론 625 이전, 이후 엄청난 사건들이 이곳을 후벼팠으며 철천지 애를 태운곳이다. 물론 우리 외가도 해당된다. 나중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 아마도 자식들의 한국해방이후 전쟁등의 산교육장소로 이곳만큼 유익한 곳은 없을 것이다. 타인들에게도 적극 추천하고 싶은 고장이다.


※ 38선 [三八線]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미·소 양국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 분계선으로서,

1945년 8월 15일 한국이 일제의 굴레에서 해방된 직후부터 1953년 7월 27일 6·25전쟁으로 인한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정치적 경계선이 되었다. 이 경계선은 순전히 타의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책정된 것이며,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민족적 비극과 고통을 안겨 준 한많은 경계선이다






○ 15시 낙산사 방문( 의상대, 홍련암, 여래상)


- 낙산사로 진입하기전부터 도로 양편에는 올초에 발생한 산불로 재가되거나 그을림이 거슬린 인근 산들의 소나무들이 엄청 애잔하게 버티고 있었다. 누가 저렇게 만들었는지. TV 로 볼때보다 더욱 화가 치밀다 못해 소나무들이 불쌍하기까지 하다는 심정이 드는 것은 현장에 오지 못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내내 차를 타고가며 본 우리 애들과 식구들은 애타는 심정과 놀라는 기색이 완연하였으니 마음 은 같은 모양이다.


- 낙산비치호텔을 입구로 의상대로 걸어갔다. 15년만에 의상대 입구, 그땐 집사람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였고 거의 30년전에는 중학교 수학여행시 같은 장소에서 사진촬영했는데 이번에는 애들과 의상대 계단에서 한 컷 촬영하였다. 나중 집에가서 세월을 추이를 한번 느껴봐야 할 것 같다.


(사진첨부)


- 마찬가지로 달라진점이 있다면 입구에 있는 몇백년 된 소나무들이 화마에 불타 사라졌고 몇몇 귀중한 소나무는 끝까지 한번 살리겠다고 부상치료 붕대를 휘감았었는데 그광경이 장난이 아니다. 어떤 인간들이 저질렀는지 사찰을 불태웠으니 부처님이 결코 용서치 않을 것이고 결국 아귀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다. 망할 것들 같으니라구.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사유로 의상대를 찾는 사람들은 많았다.


※ 의상대 [義湘臺]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降峴面) 전진리(前津里)에 있는 정자로

1974년 9월 9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48호로 지정되었다. 낙산사(洛山寺)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해안 언덕에 있다. 신라시대의 고승 의상(義湘)이 676년(문무왕 16)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에 세운 정자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지은 것이다.

동해도립공원의 명승지 가운데 가장 유명한 곳으로 바닷가 암벽 위 정자에서 맞는 해돋이는

손꼽히는 일출경으로 알려져 있다.


- 의상대를 뒤로하고 홍련암으로 향하였는데 마찬가지로 암자입구까지 불에 탄 소나무는 즐비하였으며 오히려 홍련암이 불타지 않은게 이상할 정도 였는데 한결같이 부처님 은공이란다.불교계에서는 우리나라 3대 암자가 있는데 관세음보살 제1의 성지가 동해의 낙산사라면, 제2는 남해의 금산 보리암이고, 제3은 서해 강화 보문사로서 홍련암도 게중 한곳이다.





- 홍련암 법당안에는 동해에 계시는 부처님이 착한 불자들만을 친견해주신다는 곳이 있다.이름하여 “관음굴!”. 법당 바닥에 보면 가로세로 약 8센티미터 정도의 유리창이 바닷가 암벽사이의 바닷물을 비추는데 열성적이고 진실한 불자들에 한해서는 한가지 소원은 꼭 들어준다는 해양 부처님 친견 장소로 이곳을 찾는 불자와 관광객만 하다라도 부지기수다.


- 모친과 아들, 딸 전부 들어가본다. 부처님보다는 그 유리창에 무엇이 있는지 들여다보고 오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그냥 나와도 그냥 신기한 모양이다.



※ 홍련암 관음굴(법당마루 유리구멍)


강원도 양양군에 있는 낙산사 부속암자인 홍련암(강원도 문화재 자료 36호)의 법당마루에는 특이한 형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크기 8cm 정도의 정사각형 형태의 이 구멍은 밑으로 절벽과 파도치는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이런 까닭에 672년 의상대사가 이 절을 창건한 이래 수많은 보수공사가 있었음에도 이 구멍만은 일관되게 유지돼 왔다.






- 참배하고 바닷가쪽을 보니 무척 아름다운 동해가 펼쳐져 있고 가락가락 내리는 여름비에 젖어있는 갈매기 한 마리가 바다 중간 바위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애잔하기 짝이 없다.

이른새벽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의 광경을 노래한 싯구절이 홍련암 입구에 비석에 새겨져 있어 옮겨본다


( 시구절 옮김)


(사진첨부)


- 낙산사도립공원 맨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는 해수관음상을 찾았다. 15년 전 집사람과 왔을때는 막 설치가 되어 고성쪽으로 확트여 해안선이 길게 펼쳐져있었더랬는데 지금은 해수관음상이 사방으로 수목들로 둘러쌓여 그런 풍치는 느낄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 수목들로인하여 포근감은 느낄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로지 좌대에는 낙산사 재건을 위한 불사를 바라는 글귀들이 자주 보였고 이곳 또한 화마를 완전히 피해 갈 수 는 없었는지 곳곳에 흔적이 스며들어있음을 볼 수 있었다.


(사진첨부)


- 해수관음상을 위로하고 뒷길로 난 사잇길로 낙산사 로 걸어내렸다. 부슬비가 실실 내리는 오솔기를 아내, 아들과 딸과 걸어내려오니 기분이 과히 싫지는 않았다. 낙산사 일주문인 홍례문은 완전히 소각되고 원통보전, 동종도 녹아내렸고 그 흔적만 있었고 최근 불사한듯한 건물만 몇채 둥그라니 있었는데 어이가 없었다.


※ 낙산사 [洛山寺]


강원 양양군 오봉산(五峯山)에 있는 절로서,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3대 관음기도도량 가운데 하나이며, 또한 관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유명하다. 671년(신라 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세웠다고 하며, 858년(헌안왕 2) 범일(梵日)의 중건(重建)을 비롯하여 몇 차례 중건을 거듭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소실되고 말았으며, 지금의 건물은 1953년에 다시 창건한 것이다. 이 절에는 조선 세조(世祖) 때 다시 세운 7층석탑을 비롯하여 원통보전(圓通寶殿)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원장(垣墻) 및 홍예문(虹霓門) 등이 있다. 2005년 4월 6일에 일어나 큰 산불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이 절에 관하여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의상이 관음보살을 만나보기 위하여 낙산사 동쪽 벼랑에서 27일 동안 기도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다. 이때 바닷가 굴속에서 희미하게 관음보살이 나타나 여의주(如意珠)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건네주면서, “나의 전신(前身)은 볼 수 없으나 산 위로 수백 걸음 올라가면 두 그루의 대나무가 있을 터이니 그곳으로 가보라”는 말만을 남기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지금의 원통보전의 자리이다.


원통보전 내부에는 관음상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 관음상은 6 ·25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량을 복구하고 이곳으로부터 약 8km 떨어진 설악산관모봉영혈사(靈穴寺)에서 옮겨 왔다는 관세음보살상이다. 제작 시기는 12세기 초로 추측되는데, 고려시대 문화의 극성기 양식을 나타낸 매우 아름다운 관음상이다.



- 매년 늦겨울이면 동해안의 터줏대감인 태백준령에서 불어닥치는 강풍으로 인하여 산불이 빈번하였는데 매번 이리도 많은 피해가 발생되어야 하는지 그 대비책은 없는지 아니면 정부 당국에서 관심 없는 건지, 아니면 등산객들이나 인간이 아무생각이 없는건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르겠다. 공무원인 나자신도 잘 모르겠는데 그 누가 알까. 우리의 현재 위치는 아직도 그 찾아지질 않는 모르소이다. 이 모듬 잘못이 공무원이 잘못해서 발생되는 일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수 없다는 느낌이다.


- 삽십년전(중학교때), 이십년전, 십오년전에도 항상 그랬지만 오늘의 낙산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속 존재하고 있지만 그 풍광은 매번 달리하고 있으며 느끼는 감정 또한 다르다.

그렇지만 올해 유달리 안타깝고 우리들 인간이 미운지 모르겠다. 앞으로의 삶에 있어 진정 남에게는 못할짓을 해서는 안될것이고 착하게 정의롭게 살아야 할 것 같다.


- 나는 그렇지만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나의 아들과 딸은 과연 무엇을 느꼈을까. 아무래도 세월이 몇 년은 흘러야 될 성 싶다. 이곳의 역사적인 가치와 조상과 현재의 인간들의 숨결과 자취를 느끼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그냥 관광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닐 것이다.


- 나의 아들 딸이 나중 아버지 엄마가되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을때 지금의 아빠와 엄마를 기억이나 할 수 있을란가?


○ 16시30분 외가도착(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


- 언제 다시 올까 하는 아쉬움만 남기고 이젠 외가로 향하였다. 가는 도중 간단한 먹거리 마련할 요량으로 양양읍에 있는 시장에 들렀다.

예전 아내와 같이 설악산 오색약수에서 하루를 묵고 외가를 들러기위해서 도중 하차 한 곳으로 외가 전화번호를 알지 못해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공중전화박스 비치용 전화번호부를 보고 연락한 기억이 나서 이번에도 같은 방법으로 하였다.


- 이곳 강원도는 다른 곳의 시골과 마찬가지인데 전화번호부를 보면 인명부란이 마을별로 나열되어있다. 예를 들면 나의 외가가 양양군 현북면 상광정리이면 상광정리 아무개 라 표시되어 있다. 아마도 농촌이라 거주하는 가옥과 주민들이 많지 않아서일게다.

시장내에 있는 어류상점에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연락부 열람을 부탁하였는데 마침 내어주길래 찾았더니 외삼촌 성명이 있어 손쉽게 연락을 취하였다.


- 7번국도를 양양읍에서 남쪽 주문진쪽으로 내려가다보면 하조대가 나온다. 지금은 이곳 명칭의 역사성보다는 해수욕장으로 이름이 나있지만 예전에는 조선초기 조선 개국공신인 하륜과 조준에 얽힌 사연이 있는 역사적인 유적지로 알려졌는데 현재는 군사보호시설로 묶여 있는 듯하였다. 그 때 아내와 같이 외사촌인 정덕환이가 제법 사진전공하는 학생이리고 우릴 데리고 하조대 바위에서 동해안을 배경으로 사진 촬영장소도 보고 싶었는데 나중 먼 발치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 하조대 [河趙臺]


해변에 기암절벽이 우뚝 솟고 노송이 그에 어울려서 경승을 이루고 있는데, 절벽 위에 하조대라는 현판이 걸린 작은 육각정(1955년 건립)이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인 하륜(河崙)과 조준(趙浚)이 이 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청유(淸遊)하였던 데서 그런 명칭이 붙었다고 하나, 양양 현지에는 또다른 별개의 전설도 남아 있다.


이 하조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1976년 신설 개장된 하조대해수욕장이 있다. 너비 100m, 길이 1,000m, 면적 약 2만 5000평에 달하는 이 해수욕장은 물이 깊지 않고 경사가 완만하며 배후에 송림이 우거져 있다





- 이곳 하조대 해수욕장 팻말을 보고 우회전 시골길로 들어서서 약 5분정도 차를 몰고가다보면 건너편 산중턱에 있는 외가 사랑방이 보이곤 하였는데 오늘도 여지없이 나의 기억은 정확하였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주위에 숲속과 나무들이 너무 어지럽게 늘어져 있다는 것만 차이가 있었지 전체적으로 같았다.


- 문제는 길도중 중간 폭넓게 펼쳐진 논과 고랑에 엄청난 교량이 거대한 대형크레인에 의하여 건설되고 있었고 건설현장이 곳곳에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며 또한 예전의 계곡 시냇물이 이젠 거대한 농수로로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어 지난 설레인 추억은 싹 가셔 버렸다.


- 동해시와 속초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현장이었다. (이에대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다)

우리나라의 관료형태는 국가기관, 지방기관, 공기업 할 것 없이 오로지 밀어붙이는 형태의 단면을 이곳에서 다시한번 절감하였으며 공무원 신분으로서 엄청 부끄러움을 느꼈다.


- 전부 왜들 그러는지 아직도 과거 경제개발국가의 전형적인 행정형태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작태를 이곳 순수한 강원도 깊숙이까지 밀고 오는 것이 과연 선진국을 가기위한 노정이고 경쟁력있는 국가성장인가. 지금 나의 부산 온천장에 있는 온천천과 서울에 있는 청계천은 오히려 수천억의 예산을 들여가며 깔아놓은 시멘트를 철거하여 살아숨쉬는 장소로 만들기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데 오히려 보존하고 아껴야 할 유산인 우리들의 자연환경을 이렇게까지 망쳐놔야 속이 후련하단 말인가?


- 외가댁 마당까지 깔아놓은 시멘트 도로 덕분에(?) 예전 외조부가 턱하니 앉아 부채 흔들며 마을버스 다니는 저곳 먼곳까지 하마 언제나 올까하면서 부산식구들을 기다렸다는 휑하니 트여있는 사랑방앞에 가니 이미 다른 승용차가 있었다. (나중 알고 보니 외사촌인 정덕환이 승용차이다).


- 그때서야 방안에서 외삼촌, 외사촌 정장환이, 그리고 그의 아내와 자식( 아들,딸)들이 마당으로 쏟아져 나왔다. 무척 놀라는 얼글들이다. 마찬가지로 나자신또한 몇 년만에 보는 얼굴들인가. 정덕환이 정장환 20살때보고 처음 보는 것이 아닌가.


- 우리 식구들 모아 인사 여쭙고 통성명 한다. 예전의 외조부 외조모 사랑방은 틈을 없애고 합방하여 거의 현대식으로 개수 하였으나 나로서는 그때 그당시의 체취는 그대로 묻어 나오는 것이 조금은 감격적이다.


- 급하게 차려내오는 맥주에 소주에 그냥 외삼촌과 마주 앉아 한잔한다. 이곳은 원레 안주도 필요없다. 그냥 집에 있는 막걸리와 김치 썰어 대접에 부어서는 들이키는게 이곳 술자리인데 지금은 많이도 변하였다. 치킨에다 두부에다 제법 그럴싸한 안주거리가 많다. 몇잔 들이키고 나니 배가 부르다. 그동안 참았던 말을 다하려니 말도 마음대로 나온다. 채 정리되지도 않고 화제의 요지가 말하는 사람의 주제별로 흩어지는게 당연하다. 그래도 이리저리 전부 알아 듣는다. 그게 사람 사는 정인갑다. 몇십년만에 만나도 생각과 관심은 동일한게 같은 핏줄은 핏줄인갑다.


- 그런 와중에 밖으로 나갔던 민정이가 상기된 표정으로 나에게 오면서 하는 말.

“ 그런데 아빠 집에 소있다, 웃긴다”한다.


- 나는 이번 강원도 여행 계획중에 딸보고 그랬다. 아빠 외가에 가면 소있다고 하였다. 그때 우리 딸은 믿지 못하였다. 애들의 생각으로는 설마 사람과 소가 어떻게 같이 사는 것인지 상상이 되지 않아서이다.


- 좌우간 외가댁 외양간에 있는 소 한 마리로 인하여 우리 아들 딸은 난리다. 엄청 신기하고 바라만 봐도 호기심을 끄는 모양이다. 쉴새 없이 들락날락 거린다. 소도 반가운지 주기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 엄메” 하고 울고하니 좋고 신기해서 어절줄 모른다. 소가 우는 소리도 직접 들어보는게 난생 처음이다. 그렇게도 재미있을까. 지금쯤이면 피곤해서 줄줄이 나가 떨어질 시간인데 전혀 그러질 않은 걸 보니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 그런데 방으로 나오고 들면서 문을 꼭 닫아라고 성화다. 가만보니 출입문, 창문마다 모기방지용 틀이 부착되어 잇었다. 나중에 인지한 사실이지만 소를 키우다 보니 파리 모기가 극성이란다. 옛날에는 그러질 않았는데 요즈음에는 농촌에서 가축을 키우면 파리, 모기가 극성이란다. 그래서 그런지 굉장하였다. 낮과밤으로 모기로 인하여 엄청 괴로웠다, 삼박사일내내 전식구들의 팔과 종아리에는 모기 흔적으로 벌겋게 부풀러 있었으며 부산 도착후 일주일 내내 괴로웠으니 강원도 모기 위력에 전부 놀랐을 것이다.


○ 17시 20분 하조대 해수욕장 ( 외삼촌, 외사촌, 조카등)